【윤형돈 칼럼】 윤형돈의 경영과 인간관계 ⑬-현명한 부인이 성공시킨 인상주의 화가들의 아버지 카미유 피사로

2025-09-17

잘나가는 화가가 가정부와 결혼

집안도 부유하고 잘나가는 젊은 화가가 부모에게 “이 여자랑 결혼할 겁니다. 이미 이 사람 배 속에는 아이도 있어요”라며 본인의 결혼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해외 유학까지 보내며 애지중지 키운 귀한 아들이 주방의 가정부와 결혼하겠다고 하니 부모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여자는 프랑스 시골의 농부 집안 출신으로 글을 읽고 쓰는 것도 겨우 할 줄 아는 정도였으니!

인상주의 화가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카미유 피사로(1830~1903)의 이야기다.

그러나 피사로의 부모도 남들이 반대하는 결혼을 한 지라 아들의 결혼을 반대할 수가 없었다. 피사로의 아버지는 프랑스에 사는 평범한 20대 유대인 청년이었는데 카리브해의 세인트토머스섬에서 사업을 하던 삼촌이 무역회사를 하다가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가문의 특명으로 사업을 물려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회사를 경영하면서 미망인이 된 숙모를 돌보는 것이 지나쳐서 결혼까지 이르게 되었다. 피사로의 아버지가 26살, 숙모가 33살 때의 일이었다.

19세기에 가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이런 일이 드물지는 않았지만, 유대인 율법상으로는 허용되지 않아 이들 부부는 결국 지역의 유대인 사회에서 왕따가 되었다. 그래서 피사로는 백인이 다니는 학교에는 가지 못하고 저소득층 흑인이 다니는 학교에 갔는데 이 경험이 서로 다른 모습과 환경의 사람을 품을 수 있는 포용력과 강한 정신력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피사로는 열두 살 때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는 공부를 하러 프랑스의 유대인 기숙학교에 들어갔지만 6년 동안 루브르박물관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학업을 마친 후 아버지의 회사에서 잠시 일을 하다가 베네수엘라로 훌쩍 떠나 2년간 마음껏 그림을 그렸고 스물아홉의 나이로 당시 파리의 최고 전시회인 살롱전에 풍경화를 걸 만큼 두각을 드러내었다.

부모가 파리로 이사를 하면서 피사로는 평생의 사랑인 줄리 밸리(Julie Belli)를 만나게 된다. 부잣집 도련님이고 잘나가는 화가가 종교도 다르고 별 볼 일 없는 시골 출신과 결혼한다니 주위에서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고 말들이 많았지만, 둘 사이는 여덟 명이나 되는 자녀를 낳을 정도로 금실이 그지없이 좋았다.

인상주의 화가들을 이끌다

당시 프랑스 미술계의 키워드는 ‘영원함’이었다. 신화와 역사를 주제로 그 속에 담긴 숭고하고 영원한 섭리를 매끄러운 색과 선으로 표현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피사로와 미술학교에서 만난 세잔, 모네를 비롯한 친구들은 실제 일상에서 볼 수 있는 풍경들을 생생하게 그리기 시작했고, 표현 기법도 매끄러움과 정확성에서 그때그때 순간의 빛과 공기의 분위기를 그대로 전하는 방식이 되었다.

대중과 평론가들은 ‘주제도 저급하고 붓질도 울퉁불퉁하다’라고 비난하며 이 패거리들을 ‘인상주의자’, 그림의 경향을 ‘인상주의’로 불렀다. ‘인상주의자’, 개성도 강하고 제멋대로인 이들 간의 갈등을 조율하는 큰 형님의 역할을 한 사람이 피사로였다. 이런 온화하면서도 뚝심 있는 성격은 그대로 그의 작품에 반영되었다.

1870년부터 1871년까지 프랑스와 프로이센 전쟁 때 피사로가 영국으로 피신하는 동안 그가 그린 1,500여 점의 그림이 사라지고 전쟁이 끝나도 경제적인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그림이 거의 팔리지 않은 것이다. 상황이 어려웠지만 피사로는 주위에 온화한 태도로 일관하며 계속 성실하게 그림을 그려나갔고 총 8회의 인상주의 전시회에 유일하게 모두 참가했다.

현명한 아내의 지원으로 자신을 단련하며 고난을 극복

이는 줄리가 가족을 지탱해 주면서 피사로가 의기소침하지 않도록 믿어 준 덕분이었다. 가난했지만, 가정은 항상 격의 없고 유쾌하여 가족 신문도 만들고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줄리는 아는 것은 많지는 않아도 특유의 직감과 현명함으로 피사로의 작품세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1880년대 중후반 피사로가 예순 살이 다 되어서 신인상주의를 시도하자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이를 본 줄리는 “사람들이 당신 그림에 간신히 익숙해져서 이제 좀 팔리려나 했는데 도대체 왜 또 바꾼 거야? 정신을 차려, 그리고 내가 보기엔 별로야.“

아내의 말 때문만은 아닐 테지만 피사로는 1890년에 ”나의 도전은 실패했다”라며 다시 원래의 화풍으로 돌아갔고 이때부터 피사로의 그림은 본격적으로 팔리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모든 시행착오가 농축되어 그림의 깊이와 완성도를 더했기 때문이다. 평론가들은 ”피사로의 그림은 전보다 더 세련되고 미묘해지고 구성도 탄탄해졌다“라고 평가했으며, 피사로 자신도 “오랜 세월을 작업한 뒤에야 비로소 나의 방향을 찾았다”라고 했다.

피사로가 서양미술사에 남긴 유산은 매우 크다. 세잔은 피사로를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피사로는 최초의 인상파 화가이고 우리는 그로부터 배웠습니다”고 평했다.

피사로는 온화한 사람이었지만 절대 꺾이지 않는 뚝심으로 그림과 가족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지켜냈다. 현실적인 조언과 정서적인 지지를 보내는 아내와 결혼한 덕분에 자신을 단련하고 인상주의 화가들을 이끄는 포용적 리더십과 훌륭한 인성으로 결국 그는 승리했다.

시사뉴스 칼럼니스트 / 운을 부르는 인맥관리연구소 대표 윤형돈

<편집자 주 :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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