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에 대해 ‘복지부동’ 이미지를 떠올릴 사람들이 많겠지만, 내가 만난 중에는 자기 일의 중요성과 가치를 진심으로 믿으며 열정적으로 일하는 공무원들도 있었다. 꽤 드물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런 공무원에게서 꼭 듣게 되는 말이 있다. 자신을 “승진은 포기한 사람”이라 칭하는 것이다. 담당자가 바뀌면 후임자는 전임자를 두고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분도 이제 승진하셔야 하니까요.”
수년 전, 상부 지시를 따르지 않아 불이익을 받은 공무원이 있었다. 이를 내부고발한 다른 공무원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당연히 승진하셨을 분이 좌천된 것을 보고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부당한 지시가 공론화되었으니 칭찬할 일이긴 한데, 한편으로는 ‘승진 문제를 통해서만 부당함을 깨달을 수 있는 건가’ 하는 의아함이 들기도 했다.
공무원과 군인의 ‘상명하복’의 의무를 없앤다고 한다. 국가공무원법에서 ‘복종 의무’ 조항을 삭제하고, 군인복무기본법에 ‘불법 명령 거부권’을 명문화하는 개정안이 추진되는 것이다. 내일이면 꼭 1년이 되는 12·3 계엄의 밤을 떠올리면 ‘부당한 지시에 따르지 않을 권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절감하게 된다. 개정안 필요성에도 쉽게 동의할 수 있다. 다만 이를 통해 공무원과 군인이 일하는 원리 자체가 바뀔 것이라 기대되지는 않는다. 특히 공무원에게 이미 ‘상명하복’은 일상적 작동 원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이미 수십 년 전, 조직들이 노동자의 ‘정체성’을 관리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규칙으로 일일이 통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직원에게 ‘나는 무엇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정체성은 경영자의 비전 제시와 설득보다는 주위 동료들의 일상적 행동 양상을 통해서 자연스레 체득된다. 일단 정체성이 구성되면 굳이 상명하복을 강제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 판단해서 움직여도 조직이 원하는 방향과 일치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정체성이 본래 맡은 일의 목적과 약간 다르게 정립되는 경우다. 앞의 공무원들 사례처럼 ‘승진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 혹은 ‘윗사람의 이익을 잘 지켜주는 사람’과 같은 정체성을 받아들이게 되면 정작 자기 일의 궁극적 의미에는 신경을 덜 쓰게 된다. 조직은 의도적으로 ‘성과급 잘 받아서 소비하고 투자하는 사람’과 같은 정체성을 유도하기도 한다. 관심이 소비와 투자 쪽으로 쏠릴수록 성과급 결정 기제에 자신을 맞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 상명하복이란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할 상황에서 내세우는 핑계일 뿐이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한 것뿐입니다” “까라면 까야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고 보면 12·3 내란 재판을 받고 있는 주요 인물들에게서 많이 듣는 말이다.
재판 내용을 보면 군인조차도 오로지 상명하복만으로 행동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리라는 나름의 판단에 따랐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려면 지금 할 일은 단지 법 조항을 바꾸는 것만이 아니다. 자신의 역할이 이 사회에서 가지는 궁극적 의의를 분명히 알고, 그에 따라 소신 있게 일하는 사람들이 인정받는 문화를 먼저 만들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