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최대 원조 공여국인 미국이 지난 2월 600억달러(약 84조원) 규모의 해외 원조 보조금 삭감 계획을 발표했다.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회원국의 공적개발원조(ODA) 자금은 전년보다 7.1% 줄어 5년 만에 감소했다. 국제사회가 연대 대신 각자도생을 택하자 전쟁, 폭력, 성차별, 기후위기, 빈곤 등에 시달리는 개발도상국 시민들은 ‘존엄한 삶’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
구호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관계자들은 긴박함과 인도주의 사업의 위기를 실시간으로 느끼고 있다. 지난 9일 서울 강남구 국제구조위원회(IRC) 한국사무소에서 만난 IRC 라틴아메리카지역 ODA 담당 다이애나 버넌은 “이 업계에서 일한 이래로 원조기구가 이만큼의 위기 상황에 부닥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인도적 지원이 중대한 위협에 처해있다”고 말했다.
버넌은 공적원조 자금이 구호 현장에서 잘 쓰이고 있는지 관리·감독하는 등의 일을 하고 있다. 2017년 유네스코에서 구호 관련 업무를 시작해 미 국제개발처(USAID) 지원을 받는 사회적 기업 카이젠에서 보조금 관리자로 일해왔다.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둔 IRC는 전 세계 40개 이상의 나라에서 인도적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지원하는 구호 단체다.
저소득국이 대거 포진한 중남미는 미국 원조 수혜를 많이 받아온 지역이다. 이곳 시민들은 마약 카르텔의 폭력, 기후위기, 경제난 등으로 심각한 인도주의 위기에 처해있다. 수많은 난민이 양산되자 미국은 국경 장벽을 쌓아 올렸다.
버넌은 “(인도적 지원) 필요성은 커지는데 지원금이 줄어들어 그 틈을 어떻게 메꿔갈지에 대한 고민이 많이 필요한 시기”라며 “세계 시민으로서 평화롭게 공존하고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함께 도와야 한다는 시각이 많이 없어지는 추세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의 해외 원조 삭감 결정이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줄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국은 지난해 전체 DAC 개발 원조의 30%인 633억달러(약 89조원)를 지원했다. 독일, 영국 등 ‘큰손’ 국가들도 인도 지원을 줄이고 있다고 한다.
반면 위기에 처한 인구는 늘어났다. 유엔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은 전 세계 인도적 지원이 필요한 인구를 2015년 약 7790만명으로 집계했다. 올해 추산치는 약 3억510만명으로 네 배 가까이 늘어났다. 전쟁, 기후위기 등 영향이다.
버넌 역시 지난해 3월과 11월에 찾은 베네수엘라와 온두라스에서 심각한 인도주의 위기 상황을 목격했다. 빈민촌이 있는 베네수엘라 북부 마라카이보의 한 의료 시설은 링거 바늘이 하나일 정도로 열악했다. 병원비가 없거나, 의료 기관을 불신해서 임신·출산 과정에서 한 번도 병원을 찾지 않는 임산부도 많다고 했다. 이들은 대부분 저임금 일자리에 종사하면서 베네수엘라 사회에서 소외된 원주민이었다.
IRC는 이곳에서 이동의료팀 운영과 어린이 영양식 제공 등 사업을 하고 있다. IRC 역시 미국 정부가 주요 후원처이다. 미국의 해외원조 삭감 예산이 반영되면 이 같은 사업마저 축소·중단될 수 있다.
버넌은 “(구호 활동은) 단순히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전하는 기부 개념을 넘는다”며 “모두가 안전하고 서로 포용하는 세상에서 살기 위해 인류에게 하는 장기 투자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인도주의 사업이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많은 전문가가 모여 준비하면서 진전을 이뤄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버넌은 “어떤 나라는 미국의 발자취를 갈 것이고, 호주나 캐나다 같은 다른 나라들은 인도주의 리더십을 더 확대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본다”며 “한국과 같이 전 세계 영향력이 점점 커지는 국가가 이 시기에 인도주의 분야에서 더 적극적으로 리더십을 보여줘야 하는 시기”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