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눈이 몹시 어둡다. 낯선 곳에 가면 신경이 곤두선다. 온몸에 긴장감이 감돌지만 그럴 때일수록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고 애쓴다. 모르면 물으면 된다. 알 것 같아도 확인차 다시 물으면 된다. 모임 자리에 가면 공간을 죽 둘러본다. 머릿속으로 나름의 지도를 만드는 셈이다. 매장 밖에 화장실이 위치한 경우라면, 볼일을 보고 나온 다음 어떻게 이동해야 할지 머리가 바빠진다. “나와서 오른쪽, 쭉 가서 왼쪽으로 돌기.” 나직하게 혼잣말하며 화장실에 들어선다. 앞뒤에 큰 문이 나 있는 대형 상가에서 길을 잃은 뒤 생긴 버릇이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 얘기지만 당사자로서는 진지할 수밖에 없다.
얼마 전 <디어 올리버>를 읽었다. 신경생물학자 수전 배리와 신경의학자 올리버 색스가 나누었던 편지에 수전의 이야기를 덧대어 만든 책이다. 평생 세상을 평면으로 바라보았던 수전은 지속적인 훈련을 통해 입체시(立體視)를 획득하게 된다. 학계에도 보고된 적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놀라운 시각적 체험을 편지에 적어 올리버에게 보내고, 둘의 우정은 올리버가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안구 흑색종을 진단받고 시력을 잃어가면서 올리버는 반대로 수전이 어떻게 지금껏 세상을 바라보았는지를 깨닫게 된다. 경험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세계가 떠오르기도 하고,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지극히 당연한 생각에 이르기도 한다. 이때의 눈은 지각하는 눈이자 그것을 토대로 판단하는 눈이다.
수전은 책에 이렇게 쓴다. “올리버도 나도 방향 감각이 좋지 않아서 참 답답하고도 난처했다. 우리는 언제나 길을 잃었다. 남편 댄은 이런 나를 돕고자 오래된 챙 모자에 나침반과 회로를 달았다.” 비단 저들의 사정만은 아니어서 실소가 비어져 나왔다. 올리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수전은 이런 이야기도 한다. “‘노답’이라는 세 번째 범주명은 웃기려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입니다. 노답인들은 북쪽과 남쪽이 어디에 있는지를 도무지 모릅니다. 이들은 커다란 외부 단서에 전혀 주목하지 않고, 보통 길을 잃습니다.” 성인이 된 후 입체시를 획득한 수전에겐 이 세상이 생경할 수밖에 없다. 평면으로 인식하던 세계가 갑자기 입체감을 획득했으니 말이다. 세계적인 석학들조차 길과 방향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은, 이상하게도 내게 적잖은 위로가 됐다.
나는 어딘가에 갈 때 일찍 출발한다. 헤맬 시간을 주는 것이다. 많은 휴대전화 앱이 길 찾기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때때로 그것이 일러주는 쪽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나를 본다. 한참 뒤에 그것을 깨닫고 나면 어김없이 예의 그 실소가 터져 나온다. 그러나 어두운 길눈 덕에 만나는 장면도 있다. 얼마 전에는 잘못 든 길에서 한 아이가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자기 자신과 다투고 있었다.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왜 그랬어!” 나는 실시간으로 눈앞에서 문장부호를 볼 수 있었다. 잘못 든 길이 모두 잘못된 길은 아니었다.
그날 나는 ‘길치 플레저’란 말을 만들었다. 죄책감과 기쁨이 뒤섞인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처럼, 길치 플레저는 길을 잃었기에 찾아온 기쁨을 뜻한다. 길을 잃고 헤매다 우연히 새로운 곳에 발 들이는 기쁨, 뜻하지 않게 깃든 발견, 그때 그 현장에서만 만끽할 수 있던 느낌 등을 아우르는 말이다. 문제는 내가 다시는 그곳을 찾지 못한다는 점이다. 설사 찾을지라도 그것을 내가 파악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다.
다음주에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떠난다. 시집 <유에서 유>가 미국에서 번역되어 출간된 후, LA 한국문화원에서 귀한 기회를 마련해주신 덕분이다. 강연 및 행사를 어떻게 치를지 궁리하다가도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또 어디에서 길을 잃을까. 아니다. 또 어디에서 길을 만날까. 길치의 기쁨이 여기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