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은 첫 번째 임기에는 재선을 위해서 싸우고, 두 번째 임기에는 역사를 위해 싸운다.” 미국 정가에서 자주 인용되는 말이다. 5년 단임제인 우리와 달리 미국 대통령은 4년 중임제다. 임기 4년으로 마치지 않으려면 재선에서 승리해야 한다. 그래서 첫 임기 때는 여론도 신경 쓰고 정책의 수위 조절도 하지만, 재선되고 나면 역사에 위대한 대통령으로 기록되기 위해 여론보다는 성과에 집중해 선 굵은 정치를 편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가 기억할 만한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어서 미국인들이 존경하는 대통령은 조지 워싱턴, 에이브러햄 링컨,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등으로 한정된다.
“어차피 뭐 5년 하나, 3년 하나…”
탄핵 직후 서울 서초동 자택으로 돌아간 전 대통령 윤석열이 주민들에게 “다 이기고 돌아왔으니 걱정 말라”며 했다는 말이다. 윤석열은 헛웃음 나는 어록을 많이 남겼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말이 가장 어이가 없었다. 대통령을 한번 해봤으니 만족한다는 뜻인가, 뭔가. 적어도 “반국가세력과 부정선거세력을 끝장내고 싶었는데 이를 하지 못한 게 너무 분하다”는 정도의 말은 나올 줄 알았다.
정말, 윤석열에게 대통령은 어떤 자리였을까. 자신이 생각하는 정치를 펼 수 있는 수단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대통령이라는 자리 자체가 목적이었던 것일까. 후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임기 내내 술을 가까이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때문에 매번 출근이 늦어 가짜 출근 차량을 먼저 보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해외 출장을 가면 대기업 총수를 불러내 대작하고, 어떤 그룹 총수는 끝내 복도에 토를 했다는 얘기도 재계에서 들려왔다. 일반인으로 돌아간 지금, 이 같은 루머의 진위는 차차 밝혀지겠지만, 적어도 시민들의 뇌리에 그가 성실히 대통령직을 수행했다는 기억은 많지 않다.
돌아보면 윤석열 정부는 지향하는 뚜렷한 목표가 없었다. 공정과 상식이라는 추상적인 개념만 제시했을 뿐 대한민국을 어떻게 이끌고, 어떻게 운영하겠다는 구체적이고 상세한 마스터플랜은 존재하지 않았다. 세계 10위권 경제력을 가진 국가의 최고 수장 직위와 예우는 누렸지만, 이에 걸맞게 희생하고 봉사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돈 없다며 각 분야 예산을 깎으면서도 대통령실이 먼저 허리띠를 졸라맸다는 뉴스는 보지 못했다. 손바닥에 적은 ‘왕(王)’이 그가 생각하는 대통령의 실체에 가까웠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 대통령은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꾸는 최고의 꿈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중학교 시절 하숙집 책상머리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붓글씨를 붙여놨다고 한다. 3당 합당 당시 그는 ‘대통령병 환자’라는 비아냥을 들었지만 대통령 그 자체가 종착지는 아니었다. 그는 야당 정치지도자로서 40여년을 독재권력과 맞섰고, 대통령이 되자마자 하나회 청산, 금융실명제 도입 등을 전격 단행했다. 그에게 대통령은 기득권을 깨부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왜 대통령이 되고 싶습니까.” 실패한 대통령으로 인해 치러지는 6·3 대선에서 이 질문은 특히 중요해졌다. 뻔한 출마의 변을 듣자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자신이 만들고 싶은 세상은 무엇인지, 이를 위해 충분한 준비를 해왔는지를 묻는 것이다. 오랫동안 고민하고 다듬어온 정책이 있는지, 자신과 뜻을 함께할 사람들은 충분히 모았는지를 묻는 것이다. 그래야 유권자들은 그를 ‘대통령’이라는 ‘도구’로 쓸지, 쓰지 않을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대선 후보로 선출되자마자 인공지능(AI), 반도체 등 산업계를 찾고 보수 인사들을 영입하는 등 계파와 진영을 넘어서는 인선을 선보이는 것은 이에 대한 답으로 볼 수 있다.
1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직을 내려놓는다”고 밝혔다. 사직의 변으로 “우리가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한다”고 했다. ‘반이재명’ 외 마땅한 답을 하지 못했던 보수 진영에 새로운 선택지가 생긴 셈이다.
한 대행은 12·3 불법계엄 직후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면서 헌법재판관 임명을 미루고 거부권은 적극 행사했다. 지금은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 조기 타결을 시도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알게 모르게 자기 정치를 해온 셈인데, 그동안 ‘그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구체적인 안도 마련했는지 궁금하다. 그가 2일 출마 선언을 하면 찬찬히 밝혀질 일이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