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비사
제2부. ‘5공 청산’과 전두환·노태우 갈등
7회. 전두환과 정호용의 버티기 한판

1989년 5월 29일 성환옥 경호실 차장이 백담사를 찾아왔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폭탄선언이 언론에 공개되고 9일 만이다(중앙일보 더중플 ‘노태우 비사’ 2부 5회 참조). 백담사 경호팀이 청와대 경호실 소속인데도 불구하고 지난 6개월간 경호실 고위 간부 누구도 백담사를 찾은 적이 없었다. 성환옥은 ‘성의’ 표시로 소형 발전기를 가지고 왔다. 전두환은 자서전에서 ‘방 안에 형광등을 달 수 있어서 한결 기분이 풀렸다’고 기록했다.
경호실의 성의 표시는 두 가지 의도였다. 첫째, 전두환의 폭탄에 놀란 6공 청와대는 백담사 측을 달랠 필요가 있었다. 이후 출입통제가 다소 느슨해지면서 더 많은 사람이 백담사를 찾아왔다. 둘째, 더 중요한 이유는 5월 임시국회에서 전두환의 국회 증언이 확정됐기 때문이다. 여야 중진회의는 5월 19일 국회의 서면 질의, 전두환의 국회 출석 증언, 그리고 TV중계에 합의했다. 전두환을 설득해야 했다.
전두환 ‘야당에 끌려다니지 말라고 전해라’

성환옥이 다녀간 다음 날 김윤환 민정당 원내총무(원내대표)가 ‘국회증언’을 요청하기 위해 백담사를 찾았다. 처음으로 ‘6공 핵심’ 인사가 백담사를 찾은 것이다. 김윤환은 ‘노태우 대통령 만들기’의 공신이자 전두환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이었다. 전두환은 그간 쌓였던 울분을 쏟아냈다.
“처음엔 동생(전경환 전 새마을운동본부 중앙회장)만 구속하면 된다고 했다가 다른 친인척까지 구속했고, 나중에는 대국민 사과, 재산 헌납, 은둔만 해주면 국회 증언 없이 끝내겠다고 하고서는 막상 백담사로 오니까 국회 증언을 해달라고 하는 것이냐.”
전두환의 첫 번째 불만은 노태우의 거짓말이었다. 물론 노태우의 거짓말이 여소야대 국면에서 불가피한 점이 있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당에 계속 밀리는 노태우의 우유부단한 국정 운영에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전직 대통령의 국회 증언은 통치권자의 권위와 헌정 질서에 대한 훼손을 의미하기에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야당이 요구한다고 다 들어주려고 하나. 증언할 경우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야당은 그런 의도로 증언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전두환은 특히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민감했다. 야당은 5·18과 관련해 당시 특전사령관으로 강경 진압을 현장지휘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던 정호용 의원에 대한 사법처리를 요구하고 있었다(중앙일보 더중플 ‘전두환 비사’ 3부 7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