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일은 내 목록의 상위에 있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6일(현지시간)로 예정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장례 미사 참석을 위해 이탈리아 로마로 향하는 전용기 ‘에어포스원’ 안에서 취재진에게 던진 말이다. ‘그런 일’이란 역시 미사에 참여하는 조 바이든 전 대통령과 만나 대화할 가능성을 뜻한다. 기자의 관련 질문에 ‘나로선 그저 하찮게 여긴다’는 속내를 솔직히 드러낸 것이다. 장례 미사를 취재한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WP) 기자는 “지난 1월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식 이후 처음 같은 장소에 있었던 바이든 부부와 트럼프 부부가 인사를 나눴는지, 심지어 서로 발견했는지조차 불분명하다”고 보도했다.

이날 트럼프 부부는 세계 각국 정상급 인사들을 위해 마련된 VIP 전용 좌석 중에서도 가장 좋은 상석에 앉았다. 양자회담이든 다자회의든 국제 행사에서 최고의 의전과 예우를 받길 원하는 트럼프를 위한 교황청 측의 배려였다. 트럼프는 2022년 9월 별세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국장(國葬)에 참석한 바이든 당시 대통령 부부에게 맨 앞줄이 아니고 그보다 몇 줄 뒤의 좌석이 배정되자 “세계가 미국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증거”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바이든처럼 물러 터진 지도자가 미국을 대표하니 무시를 당하는 것 아니냐’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정치든 뭐든 위치가 가장 중요한 것(LOCATION IS EVERYTHING)”이란 유명한 말을 남겼다.
교황의 장례 미사에서 바이든 부부는 트럼프 부부보다 몇 줄 뒤에 앉았다. 각국 조문 사절 중에서도 장관 등 ‘급’이 다소 떨어지는 인물들을 위한 구역이었다. 자연히 행사 내내 바이든 부부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미국 대통령을 지냈다고는 하나 현직이 아니고 전직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바이든은 풀 죽은 모습은 아니었다. WP에 따르면 바이든은 앞선 4년 동안의 정상외교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외국 지도자들과 눈이 마주치면 환한 표정으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상대방이 원하는 경우 함께 휴대전화 사진을 촬영할 수 있도록 포즈도 취했다. 상원의원 생활만 36년을 한 노련한 정치인의 관록이 느껴졌다.

하지만 교황의 장례 미사를 바로 곁에서 지켜본 인사들 중 가장 속이 쓰라린 이는 역시 바이든이었을 것이다. 올해 1월 퇴임을 앞두고 바이든은 최후의 해외 순방국으로 이탈리아와 바티칸 교황청을 선정했다. 그 자신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교황과 만나 안부를 묻고 건강을 기원함은 물론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의 국제 정세를 주제로 의견을 나누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그러나 로스앤젤레스(LA) 등 미 서부를 강타한 대형 산불 진화가 시급한 상황에서 대통령이 한가하게 외유나 즐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통령을 그만두기 전 교황과 마지막으로 재회하길 간절히 원했던 바이든의 꿈이 산불 때문에 무산되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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