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원전 굴기’… “건설 기간 단축, 저리 융자로 세계 진출”[특파원리포트]

2024-11-03

지난 23일 중국 동남부 연안의 푸젠(福建)성 푸칭(福清) 원자력발전소 5호기 주제어실(MCR). 정면에 설치된 8개 스크린에 각종 숫자가 번쩍였다. 10년 안팎 경력의 당직자가 24시간 공백 없이 원자로 노심과 증기 터빈실 현황을 알리는 수치를 긴장하며 주시했다.

리쭝린(李宗霖) 푸칭 원전 수석 관리자는 “이곳이 중국이 독자 브랜드로 개발한 3세대 가압수형 원자로 화룽(華龍) 1호(HPR1000)의 두뇌”라며 “원자로의 모든 상황을 감시·제어하는 총괄 통제시설”이라고 소개했다.

“현재 화룽1호는 중국과 해외에서 총 6기가 가동 중이고 27기가 건설 중인 세계에서 숫자가 가장 많은 3세대 원전 기술입니다.” 왕추린(王秋林) 화룽국제 대표 겸 당 서기는 전날 베이징에서 가진 외신기자 사전 브리핑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량·대규모 건설로 규모의 경제를 자랑하는 원전이라는 취지다. 화룽국제는 지난 2016년 화룽1호해외 수출을 위해 국유기업인 중국핵공업그룹(CNNC)과 중국광핵그룹(CGN)이 공동 출자해 만든 기업이다.

23일 푸칭 시내에서 버스로 50여분이 걸리는 푸칭 원전에 도착했다. 한국 언론 최초로 방문한 이곳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해안가에 일렬로 세워진 회색 돔 형태의 콘크리트 건축물 6개다. 푸칭 원전 1~6호기로, 1~4호기는 2.5세대 중국형 경수로 모델 CPR-1000을 채용했다. 이와 달리 화룽1호를 처음으로 채택한 5·6호기는 돔을 둘러싼 콘크리트 벨트가 이전 모델보다 2배 이상 두꺼워 보였다.

본부 로비에는 중국의 원자폭탄 실험 성공 60주년을 기념하는 포스터와 “강한 원전으로 조국에 보답하고 혁신으로 공헌하자(強核報國 創新奉獻)”는 원전보국 구호가 걸려 있었다.

'친원전 드라마'로 반핵 정서 계도

장언위(張恩瑜) 공청단 서기는 “화룽1호는 중국제조 2025의 핵심 프로젝트”라며 “지난해 3월 CC-TV 1 채널의 황금시간대에 방영됐던 ‘쉬니완자덩훠(許你萬家燈火, 네가 온 가정에 등을 밝히길)’ 드라마의 배경”이라고 소개했다. 이 드라마는 지난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여파로 생겨난 원전 반대 바람을 뚫고 중국산 3세대 원전을 건설하는 과정을 그렸다. 중국 내 반핵(反核) 정서를 계도하려는 당국의 의중이 반영됐다.

푸칭 화룽1호의 가장 큰 특징은 건설 속도다. 지난 2015년 5월에 착공해 2021년 1월 가동까지 68.7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푸칭 원전 관계자는 미국·유럽·러시아를 포함한 3세대 1호 원자로 중 건설 기간이 가장 짧다고 했다. 설계수명 60년인 화룽1호는 프랑스 M310 모델의 원자로 연료봉 157개보다 20개 많은 177개 노심을 채택했다. 리쭝린 수석은 “푸칭 5·6호기는 세계원자력운영자협회(WANO) 안전 규정에서 종합지수 만점을 달성했다”고 자랑했다.

이틀 뒤에는 푸칭에서 남쪽으로 400여㎞ 떨어진 곳에 건설 중인 장저우(漳州) 원전을 찾았다. 지난 15일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방문한 둥산다오(東山島)와 마주한 해안을 깎아 화룽1호 원자로 4기를 동시에 건설하고 있었다.

리빈(李彬) 장저우 원전 대변인은 “지난 9월 27일 4호기에 콘크리트 타설 작업을 했고, 10월 12일 1호기에 연료봉 투입이 시작돼 연말 가동을 앞두고 있다”고 소개했다. 부지 선정 당시 어민 등 지역 주민의 반대 여부를 묻자 리 대변인은 “경제·교육·취업 등 지원 패키지로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국보다 원전 후발 주자였던 중국은 세계 수준의 '원전굴기'(崛起·우뚝 섬)에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원전굴기 배경에는 정부의 막대한 투자와 내수에 기반한 거대 규모의 원전 생태계가 있다”며“특히 소형모듈원전(SMR), 고온가스로(HTGR) 등 거의 모든 종류의 4세대 원자로 노형마다 각각 한국의 전체 원전 연구비에 해당하는 금액을 투입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56기 가동, 31기 건설 중…2060년까지 네 배로

세계원자력협회(WNA)에 따르면 올해 전 세계에서 가동 중인 원자로는 438기, 건설 중인 원자로는 67기다. 중국에선 56기가 가동 중이며, 31기를 짓고 있다. 현재 중국 원전이 전체 전력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5%가 되지 않는다. 중국원자력협회(CNEA)에 따르면 중국은 원전의 전력 생산 비중을 오는 2035년 10%, 2060년엔 18%까지 올려 탄소배출 제로를 달성할 계획이다.

이는 서해안과 마주한 중국 원전 56기가 네 배 가까이 늘어난다는 의미도 된다. 그래서 중국 원전의 안정성은 한국에도 초미의 관심사다. 정 교수는 “2009년 이어도에 설치한 방사능 계측기와 국제기구를 통한 모니터링이 더욱 중요해졌다”라고 말했다.

세계시장에서 중국산 C원전은 ‘온타임 온버짓(On time On budget·정해진 예산으로 적기 시공)’을 내세운 한국형 K원전의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하고 있다. 실제 C원전의 해외 진출은 한창이다. 화룽1호는 파키스탄에 2기가 이미 가동 중이다. 아르헨티나로의 수출도 확정됐다.

C원전의 수출 무기는 장기 저리(低利) 금융 공세다. 정 교수는 “원전건설 비용의 저리 융자를 금지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규제를 받지 않는 중국은 파키스탄과 아르헨티나에 총공사비 82~85%를 장기 저리로 융자해 계약을 성사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했다. 다만 체코원전 수주 경쟁에서는 사전 안보와 안전 심사에서 탈락했다.

글로벌 원전 경쟁 구도에서 한국은 중국의 추격을 어떻게 뿌리칠 수 있을까. 조은정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 카드를 활용하라고 조언한다. 조 연구위원은 “중국의 원전굴기는 높은 가성비를 앞세워 주권을 강조하는 느슨한 형태의 중국식 기술표준과 핵질서가 전 세계로 확산되는 것으로 이는 단순한 경제적 아젠다 이상의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며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격상한 한·미동맹이 강조한 원자력 분야 협력을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미 간 상호 호혜적인 원자력 협력을 활용하면 중국의 세계 시장 독점과 원전 운영의 불안정성, 중국식 기술 표준과 규범 전파에 따른 핵확산금지조약(NPT) 질서의 불안 요인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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