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냉전시대에 “일본 사람은 잊지 마라, 소련 사람은 속지 마라, 미국 사람은 믿지 마라”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일본·소련에 대한 경계심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으나, 미국에 대한 충고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미국은 건국 초기 우리에게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고, 한국전쟁에서는 우리의 생존을 지켜주었으며, 그 후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안보와 성장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미국에서 확대되고 있는 ‘미국 우선주의’로 인해 발생한 조지아주 사건은 한국인의 미국에 대한 신뢰를 크게 약화시킬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헬기·장갑차 동원된 조지아 사태
동맹의 민낯 드러낸 미 우선주의
투자 재검토 포함 상응조치 필요
국격 위해선 단호하게 대응해야
미국의 일자리 창출과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며 한미동맹의 미래를 밝히는 상징으로 여겨졌던 현대자동차·LG에너지솔루션의 조지아 공장 건설 현장은, 지난 9월 4일 헬기와 장갑차까지 동원된 대규모 이민 단속 작전으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혼란 속에서 우리 국민 300여 명이 범죄자처럼 취급당하며 연행되었다는 소식은 국민 모두에게 깊은 충격과 분노를 안겼다.
이 사건은 불과 2주 전 한미 정상회담 후 홍보된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이라는 구호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미국은 ‘법 집행’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동맹국 핵심 산업 현장을 사전 협의나 경고도 없이 기습해 우방국 국민에게 지나치게 과도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는 한미동맹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자, 트럼프 행정부 2기에서 더욱 강화된 미국 우선주의와 반이민 정서가 여전히 노골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미국의 국내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우리 기업과 국민의 존엄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비자 문제라는 행정적 사안의 집행 과정에서 과도한 물리력과 군사 장비까지 동원된 이번 사태는 동맹국 간 신뢰를 불필요하게 약화시키는 부적절한 조치였다. 이 사건은 또한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동맹국의 존엄을 경시할 수 있으며, 스스로 부르짖던 자유와 정의가 타국 국민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수 있음을 전 세계에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일회성 해프닝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누적되어 온 구조적 모순이 폭발한 결과이다. 미국은 막대한 투자를 환영하면서도, 그 투자를 뒷받침할 핵심 전문 인력에 대한 합법적 비자 통로를 터무니없이 좁게 막아놓았다. H-1B나 L-1 등 공식 취업비자 발급이 극도로 까다로운 상황에서, 우리 기업들은 공장 건설 일정을 맞추기 위해 B-1이나 ESTA 같은 단기 비자에 의존하는 ‘관행’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미국이 만들어 놓은 비정상적 구조가 우리 기업을 ‘법 위반’이라는 궁지로 내몬 결과를 낳은 것이다.
물론 우리의 경제와 안보는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힘의 논리에 굴복해 국민의 자존심과 국격이 훼손되는 것을 묵인해서는 안 된다. 이번 사태로 손상된 국격을 회복하고 국민이 입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단호한 대응이 필요하다. 외교적 유감을 표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정부는 미국의 진정성 있는 공식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반드시 이끌어내야 한다. 만약 미국이 이러한 정당한 요구를 외면한다면, 힘에 겨운 대미 투자 계획의 재검토를 포함한 정부 차원의 강력한 상응 조치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이번 사건은 또한 값비싼 교훈을 남겼다. 그동안 우리는 ‘강대국의 보호’라는 달콤한 환상에 안주해 왔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동맹이 단순한 보호막이 아니라 철저히 국익을 바탕으로 한 관계임을 냉혹하게 증명했다. 이제 우리는 단순한 외교적 항의를 넘어 실질적인 행동에 나서야 한다. 재발 방지를 위해 제도적·구조적 개선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정부는 미국과의 고위급 협의를 통해 대규모 투자 프로젝트에 필요한 전문 인력의 비자 쿼터 확대와 한시적·제한적 특별 취업비자 허용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 기업들도 해외 진출 시 현지 법과 규범을 철저히 준수하는 ‘컴플라이언스 경영’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야 한다. ‘안 걸리면 그만’이라는 안일한 관행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이번 사건은 국가의 주권과 국민의 자존심을 시험하는 역사적 분수령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되새기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대통령과 정부가 이를 가볍게 넘긴다면, 그것은 국민의 우려를 외면하고 주권국가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일이 될 것이다. 단호한 의지를 갖고 외교적 역량을 총동원해 이 사태를 실질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주권국가의 존엄을 지키는 길이며, 우리가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할 진정한 자부심이자 소중한 유산이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