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했더니 평안함에 이르렀다…'출가 50년' 진우스님의 화두는 [이사람]

2025-02-19

“108배와 참선은 늘 변함없이 했죠. 힘든 것은 사실이에요. 그렇다고 마음이 불편하냐, 그건 아니에요. 무심코 하려고 해요.”

제37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진우스님(64·사진)은 4일 서울 종로구 불교문화기념관 집무실에서 진행한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무심코’라는 단어를 꺼냈다. 그는 “수행을 많이 한 사람들을 보면 몸은 아플 수 있어도 마음이 괴롭지는 않다”며 “결국 나의 인과(因果) 감정이 어려움을 만드는 것이라고 깨닫고 상기하면서 극복하기에 달렸다”고 밝혔다. ‘아무런 뜻이나 생각이 없이’를 뜻하는 이 말이 불교에서 분별망념을 일으키고 번뇌와 고통을 경험하게 해 경계해야 할 것으로 삼는 ‘유정(有情)’과 대척점에 있는 미덕처럼 들렸다. 무심코 하려고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즐거움과 성취감을 느끼고 만족을 하게 되면 반드시 대가가 생긴다는 점을 들었다. 그는 “만족이 생긴 만큼 불만족이, 기쁨이 생긴 만큼 슬픔이 생기는 것은 불변의 법칙”이라며 “어떤 일이 생겨도 평안함을 추구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진우스님이 걸어온 50년 출가의 삶은 ‘깨침’과 ‘무심코’로 요약된다. 어릴 적 할머니 손에 이끌려 강제로 출가를 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어릴 때 절에 보내지 않으면 단명할 수 있다는 것. 태백산 정암사에 있던 동헌스님에게서 들은 한 마디는 강원도 일대에 이름난 대보살로 꼽혔던 할머니에게는 귀애하던 삼대독자를 잃을 수도 있다는 청천벽력이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할머니 손에 이끌려 행자 생활을 시작한 절은 스님의 품에 안겨 달콤한 미제 사탕을 문 채 자장가처럼 소참법문을 듣던 따뜻한 기억과는 딴판이었다. 강릉 포교당에 맡겨진 진우스님은 영하 20도의 추위에도 새벽 3~4시에 일어나 새벽 예불을 해야 했다. 석 달을 하루도 빠짐없이 울었다. “자초지종을 모르니 친할머니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죠. 내가 어른이 되면 복수를 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하며 버텼어요.”

스무 살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그에게 변화는 불행의 얼굴로 찾아왔다. “평행봉 운동을 하다가 손목을 심하게 다쳤어요. 고1 때 한창 공부를 해야 하는데 글씨 쓰기가 영 힘든 거예요. 하늘이 무너졌죠. 공부를 곧잘 했었는데 뜻대로 안 되다 보니 포기할 정도가 됐어요.”

공부에서 손을 떼고 우울감과 자포자기 사이를 오갔다. 그때 집어든 춘원 이광수의 ‘원효대사’는 깨침의 계기가 됐다. ‘꼭 좋은 환경이 있는 곳에서만 인간이 행복한 것은 아니구나.’ 지금까지의 경험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어릴 적에 할머니·할아버지가 귀애하시고 행복하게 지내봤으니 절에 맡겨진 것을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행복한 시간이 있는 만큼 언젠가 똑같은 질량의 불행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채면서 ‘분별’을 깨쳤죠.”

그가 설명하는 분별은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 등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분별하는 마음 자체가 없어져야 ‘중도’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후 고구마 줄기 캐듯이 궁금증에 따라 불교 공부를 이어가던 진우스님은 황산덕 법사의 ‘중론송’과 신소천 스님의 ‘금강경 강의’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자 이제 집으로 돌아오라는 할머니·할아버지에게 폭탄 선언을 한다. 출가를 하겠다는 것.

“출가(出家)가 집을 떠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출가의 ‘가’가 사실은 집보다는 집착을 뜻하는 말이에요. 집착과 욕심에서 벗어나라는 게 출가의 의미죠. 원하는 게 생기는 순간 대가가 따라오고 괴로움이 생기니까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나겠다는 거죠. 그때 진짜 출가를 했어요.”

전남 완도 신흥사에서 첫 주지 소임을 맡아 13년간 재직했고 담양 용흥사 주지 시절에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진우스님은 2000년 주지로 부임한 직후 대웅전과 중화당·회성당·미타전·적묵당·보제루 등을 건립하며 용흥사를 탈바꿈했다. 많은 이들이 큰 업적으로 삼는 용흥사 재건에 대해서도 “여러 조건들이 모여진 것이지 특별한 무언가를 애써서 한 게 아니다”라며 “변함없이 한 것은 108배와 참선·염불”이라고 했다. 2012년 전남 장성의 백양사에서 주지로 활동하며 조계종 중앙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2015년 조계종 재심호계위원으로 중앙에 진출한 후 본격적으로 주지로서의 소임과 조계종 중앙의 보직을 맡아 하게 됐다. 달라진 위치에 따라 얻게 된 희로애락에 대해 묻자 진우스님은 이 같이 답했다.

“어떤 때는 굉장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도 있어요. 하지만 ‘산에 내가 혼자 편안히 있다고 해서 그런 감정이 없겠느냐’ 물으면 그건 아니에요. ‘유정(有情)’한 상태에 있는 한 시공간에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이죠.”

일로 엮였을 때 지적을 하거나 싫은 소리를 해야 될 때도 있다. 진우스님은 “잘못한 일이 있을 때는 잘못했다고 쓴소리를 한다”면서도 “다만 미운 감정을 넣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오로지 나의 몫이라는 것이다.

리더로 일하는 것은 목표를 세우는 일이다. 진우스님은 일상의 5분 선명상을 강조해 불교를 대중과 가까이 하는 한편 30년 만에 조계종 조직 개편을 시행해 총무원과 교육원·포교원의 통합을 시행한다. 리더로서 목표를 세우고 성과를 내는 것은 언뜻 스님의 삶과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원하는 게 있어도 그게 안 됐다고 해서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일정한 조건이 되고 연결이 되다 보면 하나의 현상이 되고 결과가 나오다 보니 ‘이런 조건이 돼서 이렇게 되는구나’ 하면서 마음을 크게 상하지 않으려 해요. 그래서 실패 자체를 생각한 적이 없어요.”

최근 청년층 사이에서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넘어 ‘아보하(아주 보통의 하루)’를 지향하는 것과도 닮은 점이 있어 보였다. 동시에 많은 이들이 ‘꿈을 높게 꿔라’ ‘꿈은 이뤄진다’ 등의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것에 대해서는 스스로 족쇄를 채우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도 있다. 그는 “내가 원하는 것이 이뤄진다는 마음은 그곳에서 내가 행복을 느낀다는 말”이라며 “행복으로 인해 불행이라는 대가를 치르는 것보다 지금 이 순간 평안하고 편안한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회적 혼란 역시 개개인이 편안함을 추구하는 만큼 그게 다시 대가로 돌아오고 욕심에 의한 결과물이 혼란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진우스님은 “각자가 중도의 자세를 갖춰야 지나친 행동으로 가지 않는다”며 “사회 탓, 국가 탓을 하기 전에 스스로 마음을 돌아보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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