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찾지 않는 버림받은 기념비

2025-03-11

서울의 가장 중심거리에 비석이 하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모른다. 설사 알더라도 애써 무시한다. 드물지만 욕을 하는 사람도 있다. 광화문 네거리, 교보빌딩 코너에 있다.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의 숫자는 엄청나다. 하지만 비석은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다.

비석의 이름은 칭경비다. 고종이 스스로 세웠다. “고종의 재위 기간은?” 가끔 수업 중 물어보면 대부분 10년 안팎으로 답한다. 짧으면 4~5년에서부터 길어야 10년 정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려 44년간 군주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격동기에 그 오랜 세월, 어떻게 그 자리를 꿰차고 있었을까. 답은 아주 간단하다. 오로지 자신의 왕좌를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종묘사직, 조선 민중의 안위, 행복은 관심 밖이었다. 자신이 지닌 부와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면 일본에, 때로는 중국에, 가끔은 러시아에 붙었다. 이런 부단한 노력 덕분에 44년간 왕자리를 보전하게 된다. 조선왕조 오백년 중 영조, 숙종에 이어 세 번째로 길다.

한마디로 자신의 영화만 챙겼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02년 즉위 40년을 축하하기 위해 칭경비를 세웠다. 당시 돈으로 100만원 들었다고 한다. 그해 국가 예산이 800여만원이었다. 예산의 8분의 1이 잔치비용으로 들어간 것이다. 자신을 위한 화려했던 잔치가 끝나고 3년 뒤 조선은 망했다(을사늑약).

그런 고종을 빼어난 인물이라고 미화하는 주장도 있다. 납득하기 어렵다. 누가 뭐래도 나라를 빼앗긴 가장 큰 책임은 고종에게 있다. 부인하기 어려운 실체적 진실이다. 어두운 비각 안에 웅크린 칭경비를 보면 온갖 생각이 다 든다. 무능한 지도자 탓에 망국의 선조들이 만주, 북간도 등에서 겪은 고초를 생각하면 한없는 분노를 느끼게 된다. 이런저런 이유로 고종에게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연민마저도 아끼고 싶은 심정이다. 광화문 네거리, 느닷없이 찾아온 봄볕이 심벌즈처럼 꽝꽝 쏟아지고 있다.

김동률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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