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중견·중소 제약사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미래를 위한 연구개발(R&D) 비용을 줄이며 실적 회복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17일 한국바이오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1~3분기 국내 상장 의약품 기업 연구개발비는 총 2조1487억원에 달했다. 이는 전년 동기(2조1192억원) 대비 1.4%(294억원)가량 늘어난 것으로, 1~3분기 매출(20조4621억원)에서 연구개발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10.5% 수준이었다.
기업 규모별로 보면 중견 상장 의약품 기업 연구개발비가 1조993억원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대기업 7800억원, 중소기업 2693억원 순이었다.
전체 연구개발비는 늘었지만 2023년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중견기업과 중소기업 연구개발비는 각각 1.2%(139억원), 6%(171억원)씩 줄었다. 대기업 연구개발비가 8.4%(604억원) 증가한 것과 대조적이다.
연구개발 인력 역시 ▲중견기업 3405명 ▲대기업 1879명 ▲중소기업 1005명 순으로 많았지만, 중소기업의 경우 지난해(1017명)보다 연구개발 인력이 줄었다.
이 같은 추세는 주요 중견·중소 제약사 실적을 살펴보면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일동제약은 지난해 3분기 누적 영업이익 47억원을 기록하며 전년 동기 대비 흑자 전환했지만,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비 비율은 2023년 말 16.3%에서 지난해 3분기 기준 1.42%로 급감했다.
오너 3세인 윤웅섭 부회장이 지난 2016년 취임 후 꾸준히 신약개발 사업에 공을 들이던 것과 비교하면 지난해에는 잠시 주춤한 모양새다. 윤 부회장은 취임 전인 2015년 10.5% 수준이던 R&D 투자 비율을 5년 만인 2020년 19.3%로 약 두 배 확대했다. 각각 2019년과 2023년에는 신약개발 전문 자회사인 아이디언스와 유노비아를 설립했다.
R&D 부문 분사와 일부 신약후보물질 기술이전이 겹치며 비용이 줄었다고는 해도 연구개발비 투자가 예년보다 줄어든 것으로 분석된다.
자회사 유노비아도 지난해 1분기 134억원의 순손실을 낸 뒤 대표이사를 교체하고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등 고강도 경영 효율화에 나섰다. 지난해 2분기 71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해 적자 폭을 줄였으나 다음 분기에 다시 적자 폭이 확대되며 지난해 3분기 누적 순손실은 324억원을 기록했다.
오너 3세인 유원상 대표가 2020년 취임한 이후 신약개발 투자에 적극 나선 유유제약도 지난해에는 연구개발비를 줄였다. 유유제약은 지난 2019년 2.4%이던 매출액 대비 R&D 투자비율을 2023년 8%로 3배 넘게 늘렸다. 안구건조증 치료제 후보물질 'YP-P10'에 대한 임상을 직접 진행하는 등 연구개발이 본격화돼서다.
그러나 지난해 3분기 연구개발비는 21억원으로 전년 동기(72억원) 대비 70% 감소했다. 매출액 대비 연구비는 4.3%로 전년 동기 25.1% 대비 크게 낮아졌다. R&D 비용을 줄이며 지난해 3분기 누적 영업이익은 120억원으로 전년 동기 8000만원에서 1만4900% 급등했다.
유유제약 관계자는 "원가 절감, 수익성 높은 자체 제품 위주 포트폴리오 구성, 효율적 판관비 집행 등 기업 체질 및 시스템 개선을 통해 수익성 증대에 성공했다"고 설명했다.
일동제약과 유유제약은 매출이 정체된 가운데 연구개발비 지출이 늘며 지난 2023년 순이익 적자를 기록한 바 있다. 특히 유유제약은 주요 파이프라인이었던 안구건조증 후보물질이 임상 시험에서 통계적 유의성 확보에 실패하며 강도 높은 체질 개선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부광약품은 지난해 3분기 영업이익과 순이익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흑자로 전환되는 등 실적이 개선됐지만 연구개발비는 줄였다. 영업이익은 전년동기 대비, 전기 대비 모두 흑자로 전환하며 32억원을 기록했고, 순이익 역시 모두 흑자로 전환하며 1억원을 기록했다.
연구개발비는 전년동기 대비 32.8%, 전기 대비 3% 감소한 69억원을 기록했다. 연구개발비율은 6.4%로 전년 20.7% 대비 큰 폭으로 비중이 줄었다.
부광약품은 R&D 투자 비율을 지난 2021년 14.89%에서 2022년 15.39%로 꾸준하게 높이다가 2023년 그 두 배인 31.38%까지 끌어올리며 공격적 투자에 나섰다. R&D 비용 증가에 따라 2022년 적자 전환하며 영업손실 2억3000만원을 기록했고, 2023년에는 영업손실액이 375억원으로 확대됐다. 손해를 무릅쓴 투자에도 불구하고 주요 파이프라인이 임상에서 미끄러지며 연구개발 자회사 한국지사를 폐쇄하고 파이프라인을 정리하는 등 비용절감에 나섰다.
개발 리스크가 큰 신약개발이 성과를 내지 못하며 주요 중견·중소 제약사가 연구개발비 지출을 줄이는 것에 대해 업계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신약개발은 제약사의 미래 먹거리를 위한 중요한 투자인데, 대기업과 양극화가 심화하며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김은희 한국바이오협회 산업통계팀장은 "의약품 분야 중소기업의 경우 매출 및 영업이익이 감소되고 있고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와 연구개발 인력도 축소되고 있어 투자유치 및 수익성 개선을 위한 적극적인 방안 강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송창현 KISTEP 성과확산센터 부연구위원은 "제약산업은 대기업과 중소·벤처기업의 역할이 구분되어 있는 가치사슬을 가지는데, 중소·벤처기업들은 상대적으로 성과 창출이 용이한 기초연구 및 후보물질 발굴 단계에 집중한다"면서 "최근 들어 국내에서 신약개발 분야 전문 중소·벤처기업이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고, 이들이 발굴한 후보물질이 국내외 대기업에 기술이전 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신약개발 분야 정부 R&D 투자 효율성 제고를 위해 중소·벤처기업 중심의 산업 생태계가 보다 확장되어야 하며, 연구 수행기관의 자율성을 확대하는 방안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