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선데이] 지역에서 예술이 피어나려면

2025-03-28

2006년, 한국 전통춤의 거장들이 프랑스 남동부 올리울에 위치한 샤토발롱 공연장을 찾았다.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보유자 강선영, 경남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 보유자 김덕명, ‘민살풀이춤’ 명인 장금도 등 전설적인 명무들이 공연 ‘전무후무’를 위해 먼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출연진 평균 연령 80세. 이제는 모두 타계했지만 그들이 남긴 몸짓 하나하나는 살아 있는 역사였다.

공항에서 오랜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깊은 산속의 황량한 주차장이었다. “이곳에서 공연이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도 잠시, 공연장이 모습을 드러내자 감탄이 절로 나왔다. 700석 규모 중극장과 리허설 스튜디오, 1200석 야외극장이 웅장한 자태를 뽐냈다. 예술가들의 창작을 돕는 토굴형 숙소까지 갖추고 있어 단순한 공연장이 아닌 완벽한 창작 공간이었다.

문체부 최근 ‘문화한국 2035’ 발표

지역 문화의 발전 방안 제시했지만

국립예술단체 지방 이전 문제 논란

정부와 예술계가 소통으로 풀어야

공연 당일, 관객이 찾아올까 걱정했지만 화려한 조명이 켜지자 버스와 승용차를 타고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객석은 금세 만석이 되었고 한국 전통춤의 거장들에게 뜨거운 찬사가 쏟아졌다. 그 순간, 예술을 사랑하는 나라 프랑스를 실감했다. 이 작은 도시에서 한국 전통춤이 빛을 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샤토발롱이 외진 지역적 한계를 뛰어넘어 예술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국가 차원의 지원을 받은 덕분이다.

프랑스 문화부는 1991년부터 예술적 다양성과 지역 문화 발전을 위해 ‘센 나시오날(Scene nationale, 국가 지정 공연장)’ 제도를 운영해오고 있다. 국립극장이 특정 도시에 한정된 것과 달리, 전국적으로 예술 경험을 확산하는 공연장에 국가 명칭을 부여하고 지원하는 방식이다. 샤토발롱도 2015년 ‘센 나시오날’로 지정되면서 그 위상을 더욱 공고히 했다. 현재 프랑스 전역에 78곳이 이 라벨을 달고 있으며, 공연장들은 수준 높은 프로그램과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국가는 이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덕분에 관객들은 ‘센 나시오날’이라는 신뢰할 수 있는 브랜드를 통해 공연을 즐긴다.

프랑스의 지방분권 정책은 공연장뿐만 아니라 예술가와 예술단체 중심으로도 탄탄하다. ‘재정적 어려움으로 창작 기회를 포기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기조 아래, 1980년대부터 지역문화사무국(DRAC) 제도를 운영해 지역 예술의 자율성을 강화했다. 특히 1984년 설립된 19개 국립안무센터(CCN)는 지역 예술가와 무용단체를 적극 지원하며 프랑스를 무용 강국으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2014년 ‘지역문화진흥법’을 제정하는 등 지역 예술 활성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서울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변변한 공연장을 찾기 어려울 뿐 아니라, 공연장이 있어도 상주 예술단체가 없어 텅 빈 경우가 많다. 지역 문화 활성화를 위해서는 대대적인 투자가 필수적이지만, 현실은 문화 강국을 외치면서도 정작 투자는 미미하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체육관광부가 ‘문화한국 2035’라는 향후 10년간의 문화정책 비전을 발표한 것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특히 ‘지역문화 균형발전’을 첫 번째 핵심 과제로 삼아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아쉬움이 크다. 국립예술단체의 지방 이전 논란이 대표적이다. 지역 문화 인프라가 충분히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단순히 단체를 이전하는 것이 실질적인 균형 발전이 될 수 있을까. 더욱이 문체부는 국립단체 5곳의 이사회 및 사무국을 통합하는 절차를 시작했지만, 정작 대의를 설명하기도 전에 반대에 부딪혔다. 각각 다른 지방으로 이전을 추진하면서 왜 행정조직을 하나로 통합하려 하는지 의문도 든다.

이번 정책 발표의 가장 큰 문제는 문체부와 예술계 간 소통 부족이다. 성공적인 예술 정책을 위해서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기 전에, 촘촘히 짜인 예산안까지 눈앞에 놓고 충분한 협의를 거치는 것이 필수다. 모든 정책이 완전한 동의를 얻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다수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은 거쳐야 한다.

프랑스처럼 소도시에서도 세계적인 공연이 가능하려면 어떤 길이 최선일까. 프랑스는 문화를 지역 발전의 핵심 전략으로 설정하고, 이를 위한 대대적인 예산을 확보했다. 국립예술단체의 통합과 지방 이전은 하나의 방법일 뿐,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술계의 반대로 지속 가능성이 불확실한 정책을 추진하기보다는 문체부와 예술계가 함께 문화 강국의 비전을 만들고 예산 당국과 정치권을 설득해 대규모 투자를 유도하는 것이 진정한 지역 발전 전략이 아닐까.

장인주 무용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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