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선장군이야? 아주 당당해”…전두환, 연희동 복귀한 그날

2025-05-14

노태우 비사

제2부 5공 청산과 전두환·노태우 갈등

9회. 백담사 전두환, 769일 만의 하산

전두환 ‘연희동 집은 명예회복의 상징’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국회 증언을 위해 백담사에서 서울로 향했던 1989년 12월 31일 새벽 이순자 여사와 가족들은 백담사 법당에서 3000배를 올렸다. 전두환의 무사귀환과 함께 ‘연희동 집으로의 복귀’를 기원했다. 전두환은 다음 날 새벽 무사귀환했지만 연희동 복귀는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이었다.

6공 청와대가 전두환에게 국회 증언을 요청할 당시만 해도 ‘증언 후 조속한 연희동 복귀’를 약속했다. 그러나 국회 증언 이후에도 여론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대다수의 국민은 연희동 집을 이미 국고에 헌납한 것으로 생각했다. 전두환이 1988년 11월 백담사로 들어가면서 발표한 ‘대국민 사과문’에서 ‘연희동 집은 정부가 국민의 뜻에 따라 처리해 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바로 앞 문장이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축재했다고 단죄받는 사람이 더 이상 재산에 무슨 미련이 있겠습니까’였다.

그런데 위 문장은 전두환 측과 6공 청와대가 협상 과정에서 만들어낸 기만적 표현이다. 맥락상 ‘재산에 미련이 없는 전두환이 연희동 집을 정부에 맡긴다’는 의미다. 그러나 5·6공 협상팀들은 ‘국민의 뜻에 따라 처리한다’는 의미를 ‘법치국가에서 국민의 뜻이란 법에 따르는 것이며, 법적으로 하자가 없으면 당연히 되돌려준다’로 해석했다. 정치적으로 ‘헌납’처럼 읽히게 만들고, 내부적으로는 ‘반환’하기로 짠 것이다.

그러니 백담사 측에서 ‘약속 지켜라’고 큰소리쳤다. 6공 청와대가 내놓은 궁여지책이 ‘제3의 장소’로의 하산이었다. 제3의 장소로는 서울 근처 경기도 용인과 과천 등에 있던 별장이 꼽혔다. 전두환은 ‘절대 반대’였다. 그에게 연희동 집은 명예회복의 상징과 같았다.

전두환은 ‘불법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대국민 사과와 백담사 유폐는 정치적·도의적 행위라고 자기합리화했다. 사과문에서 헌납하기로 한 ‘정치자금’은 퇴임 후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으로 사용할 공적 용도의 돈이며, 의장직을 사퇴했기에 반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절차라 생각했다.

당연히 연희동 집은 사유재산으로 자신의 소유며, 자신의 가족(딸 내외와 막내아들)이 계속 살아야 하며, 백담사에서 하산할 경우 돌아갈 곳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연희동으로 복귀할 수 없다는 것은 ‘불법 사유재산’이라 인정하는 꼴이 되기에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6공 청와대는 ‘여론이 좋지 않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사정했다. 전두환의 생일(1월 18일) 하루 전 정구영 민정수석이 축하 인사차 백담사를 찾았다. 하산에 대해선 확답을 피했다.

백담사가 경악한 것은 정구영 방문 직후인 1월 22일 발표된 ‘3당 합당’이었다. 전두환은 자신이 만들었고, 노태우 정권 재창출과 평화적 정권교체에 성공한 민정당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런 민정당을 노태우가 없애버린 셈이다. 그래서 전두환은 ‘3당 합당’을 5공과의 마지막 ‘절연(絶緣)의식’이라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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