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와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한국 반도체 산업의 숙원인 ‘고급 설계자’ 양성 대학원을 세웠다. 급변하는 인공지능(AI) 시대에 시장·기술의 큰 그림을 읽는 설계 능력 없이는 한국 반도체가 저부가가치 산업으로 밀려날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다.
‘집 짓기’ 넘어 ‘집 설계’로
KAIST 시스템 아키텍트 대학원이 오는 3월 첫 입학생을 받는다. ‘고대역폭메모리(HBM)의 아버지’로 불리는 김정호 교수가 대학원장을 맡았고, 삼성전자 DS(반도체)부문 직원 10여 명이 회사 장학금을 받고 진학한다. 석·박사 학위 과정의 정식 대학원이자, 시스템 아키텍트 양성을 목표로 하는 국내 최초의 대학원이다.
시스템 아키텍트란 건축 도면을 그리듯 반도체 최상위 구조를 설계하는 고급 엔지니어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두루 이해하며 각 기술을 최적화해 적용할 수 있어야 해,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지휘자에도 비유된다. 빅테크는 반도체 경쟁력을 높일 때 아키텍트 영입부터 공을 들인다. 특히 AI 연산을 수행하느라 지능형처리장치(NPU)나 텐서처리장치(TPU) 같은 다양한 반도체가 등장하면서, 세상에 없던 반도체의 개념을 만드는 아키텍트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대표적인 아키텍트는 애플 실리콘, AMD의 젠(Zen), 테슬라 자율주행 칩을 설계한 짐 켈러 텐스토렌트 창업자인데, 그가 거쳐간 회사마다 반도체 성능이 단숨에 올라갔다.
‘숙제 잘하는’ 한국 반도체, 한계 직면
그간 한국 반도체는 인텔·엔비디아처럼 기술을 주도하는 ‘갑(甲)’이 그려준 그림대로 정밀하게 제조하고 대량 양산하는 ‘똘똘한 을(乙)’이었다. 그런데 AI 시대에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 HBM은 기술 표준이 늦게 정립된 데다가 빅테크 기업들이 각자 원하는 기능대로 ‘맞춤형 HBM’까지 원하고 있다. 메모리와 시스템 반도체 경계가 흐려지고, ‘기술을 어디에 써야 판을 바꿀지’ 파악하는 능력이 중요해졌다.
지난 16일 TSMC 실적발표에서 웨이저자 최고경영자(CEO)는 6개월 후 회사 매출에 크게 기여할 먹거리로 ‘HBM 컨트롤러’를 꼽았다. 컨트롤러는 메모리를 제어하는 시스템 반도체인데, 차세대 HBM(6세대, HBM4)부터는 컨트롤러가 HBM 내부로 들어온다. SK하이닉스뿐 아니라 삼성전자도 컨트롤러를 TSMC에 맡기려 한다. 이에 웨이 CEO는 “우리의 첨단 시스템 기술 때문에, 모든 메모리 공급사가 우리와 일한다”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고부가가치인 HBM의 파이를 잘라 가려는 전쟁은 이미 시작된 셈이다.
김정호 교수와 삼성전자 DS 경영진이 의기투합한 건 이런 위기감에서다. 특히 삼성전자의 요청이 강력했다. 기술 수준이 높은 단계일수록 설계 인력 부족이 더 심해지자, 대학원을 세우는 장기 투자로 인력을 양성하겠다는 거다.
교수진은 김정호 교수 외에도 정명수·김동준 교수 등 KAIST 전기·전자공학부의 컴퓨터 구조 전문가들로 꾸려졌다. 정 교수는 시스템 반도체 스타트업 ‘파네시아’ 창업자이기도 하다.
괴리된 산학, 다시 밀접해져야
학계에서는 이번 아키텍트 대학원이 산학 간 거리를 좁히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단지 기업이 자금을 대고 학교가 이론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기업은 기술적 현안을 공유하고 학계는 이를 세부 과제로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는 산학 협력을 해야 한다는 거다.
특히 시스템 아키텍트는 최신 업계 동향과 알고리즘까지 파악해야 해, 학교에서만 기를 수 없다는 게 정설이다. 김용석 가천대 반도체대학 석좌교수는 “아키텍트 양성의 열쇠는 기업이 쥐고 있다”라며 “인력을 특정 기능에 사용하는 게 아니라, 설계부터 테스트까지 반도체 설계의 전 주기와 소프트웨어 개발까지 두루 거치도록 길러내는 철학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