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은 입시 경쟁, 부모는 이것 걱정”…한국 등지고 떠나는 이유 들어보니

2024-11-11

차창희 기자(charming91@mk.co.kr), 문지웅 기자(jiwm80@mk.co.kr)

한국 국적 포기자 한해 2만명

싱가포르는 상속세 없고

미국은 공제혜택 범위 넓어

슈퍼리치 이민 행렬 이어져

단순 유학보다 영주권자에

다양한 취업 기회 열려있어

“자녀교육·일자리위해 떠나”

# 서울시 서초구에 살고 있는 장모 씨(64). 주식과 부동산 투자를 통해 수 백 억원 금융·실물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이른바 ‘슈퍼리치’다. 장 씨는 상속·증여세 부담에 미국으로 투자이민을 계획하고 있다.

장씨가 성인 자녀 1명에게 50억원을 상속한다고 가정하면, 증여세는 30억원까지 10억4000만원이 부과되고, 이를 초과한 나머지 20억원에 최고세율 50%가 적용돼 10억원이 추가되며 총 22억4000만원이 발생한다. 문제는 당장 수십 억원 현금이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장씨가 미국으로 투자 이민을 떠난 뒤 성인 자녀 1명에게 동일한 가치인 358만달러를 넘겨준다면, 상속세는 0원이다.

장씨는 “자산가들은 스스로 공부하고, 노력해서 큰 돈을 번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했다는 선입견이 많은 것 같다”며 “자산가에 대한 차별이 적고, 세금 부담을 낮출 수 있는 곳으로 이민을 가는 건 어찌 보면 합리적 선택”이라고 말했다.

# 경기도 분당에 거주하는 50대 권모 씨는 자녀 교육과 취업 문제로 최근 투자이민 컨설팅을 받았다. 단순 유학을 보내는 것보다 투자이민을 통해 영주권을 획득하는 게 자녀들에게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추첨제인 미국의 취업비자(H-1B)는 일자리 기반 스폰서가 있어야 하고, 경쟁률이 높은 편이다. 반면 상대적으로 투자이민 비자(EB-5)는 80만달러(약 11억1960만원) 비용만 지불하면 쉽게 확보할 수 있다.

정당한 부의 대물림을 막는 보수적인 세법 상속·증여세 정책이 25년째 장기간 지속되자 슈퍼리치들의 불만이 폭발했다는 분석이다. 투지이민업계 관계자는 “투자이민 인기 국가가 모두 한국보다 세금 혜택이 좋다”며 “이민의 가장 큰 사유가 세금인 건 부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의 성장 동력이 저하되고, 양질의 일자리 공급이 줄어들 것이란 판단에 자녀의 장래를 위해 교육·취업 이민을 떠나는 자산가들도 많다.

10일 투자이민업계에 따르면 최근 들어 몰려드는 자산가들의 상담 요청에 하반기 들어 세미나를 연속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10월 들어서만 4곳 이상의 투자이민회사가 세미나를 열었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세무사, 미국 변호사 등 전문가들을 전면에 배치해 고객마다 맞춤형 이민 전략을 컨설팅을 하는 곳도 늘어났다.

자산승계 전문가인 조웅규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자산 규모가 수천억원에 달하는 슈퍼리치는 아예 상속세가 없는 싱가포르를 노리는 경우가 많다”며 “반면 자녀들이 중·고등학생이거나, 대학생인 경우 교육 목적에서 미국 이민을 많이 생각한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한국에서는 세금폭탄 부담에 부의 승계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한국의 상속·증여세 최고세율은 전 세계에서 압도적으로 높다. 상속·증여세 모두 최고 세율은 50%(30억원 초과 시)가 적용되는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치(26%) 대비 2배가량 높다. 일본(55%)에 이은 2위지만, 최대주주 할증이 붙으면 한국은 60%로 늘어난다. 유럽의 경우 상대적으로 최고세율이 높다고 평가되는 프랑스(45%), 영국(40%)도 한국보다는 낮다. 스웨덴과 체코는 상속세를 폐지했고, 중국과 싱가포르는 상속세 개념 자체가 없다.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총조세 대비 한국의 상속·증여세 부담 비중은 2.1%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0.4%의 5배가 넘는다. 미국은 0.6%, 영국도 0.8%에 불과하다. 일본은 최고세율이 우리보다 5%포인트 높지만 총조세에서 상속세가 차지하는 비중은 2021년 기준 1.5%로 우리나라에 비해 훨씬 낮다.

한국 슈퍼리치들이 투자이민 행선지로 선호하는 미국의 상속세 최고세율은 40%로 낮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공제혜택이 풍부하다는 게 장점으로 꼽힌다. 미국 국세청에 따르면 올해 기준 미국은 1361만달러(약 190억원)까지는 상속을 해도 세금이 없다. 넉넉한 공제 한도 덕에 미국에서 상속세를 내는 비중은 0.1%도 안 된다.

최근 정부가 자녀 공제를 강화해 상속세 부담을 낮추는 세법 개정안을 발표했다. 정부는 지난 7월 세법 개정안을 발표하면서 25년째 이어지고 있는 상속세 최고세율을 50%에서 40%로 낮추겠다고 밝혔다. 대신 최고세율 구간을 과세표준 ‘30억원 초과’에서 ‘10억원 초과’로 바꾸는 안을 제시했다.

정부는 또 중장기적으로 유산세 방식인 현재 상속세 과세 체계를 유산취득세 방식으로 전환할 방침이다. 유산세는 피상속인(사망자) 기준으로 상속재산에 대해 일괄적으로 상속세를 부과하는 방식이다.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9월 기자간담회에서 “이르면 내년 상반기 중에 유산취득세 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야당이 다수인 국회에서 개정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작다는 게 슈퍼리치들의 판단이다. 증권사 자산관리(WM) 관계자는 “부자 감세 논리를 펴는 야당이 다수당인 만큼 정부 안에 따른 상속세 부담 완화가 이뤄질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하는 부자들이 많다”며 “이들이 자신들의 자산과 가족의 부를 계속 지킬 수 있는 방안으로 이민을 계속 고려하는 이유”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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