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전, 집 앞 자판기에서 캔커피 하나를 뽑아든 그는, 차에 올라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올드 팝을 들으며 가벼운 미소를 짓는다. 샌드위치 하나로 점심을 해결하면서도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필름 카메라에 담는 그의 얼굴에선 어떤 깊이마저 느껴진다. 일을 마친 그는 동네 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자전거를 타고 간 단골식당에서 간소하게 저녁을 해결한다. 집에 돌아와서는 헌책방에서 산 윌리엄 포크너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등의 소설을 읽다가 잠이 든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으며, 내일도 그럴 것이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 히라야마(야쿠쇼 고지)의 하루는 매일매일이 별다를 것 없다. 구구절절 보여주지 않지만, 히라야마라고 왜 사연이 없을까. 그럼에도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히라야마의 온전하고 오롯한 하루에 집중한다. 도쿄 시내 화장실을 청소하는 일이 직업인 히라야마의 삶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아보하’(아주 보통의 하루)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1937년 출간된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조지 오웰이 영국 북부 탄광지대의 실업 문제를 취재하고 써낸 르포르타주다. 그는 두 달여 취재 기간 동안 광부들의 삶을 직접 경험하기 위해 싸구려 하숙집과 광부들의 집에서 주로 묵었다. 하숙집 침대는 불결함은 말할 것도 없고, 한 사람이 편히 누울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잠결에 발을 펴기라도 하면 옆 침대에서 자는 사람의 “등허리를 차버릴 수” 있을 정도였다. 잠자리뿐 아니라 먹을 것, 입을 것 하나 변변한 것이 없었다.
탄광 안은 흡사 지옥 같았다. 갱도는 좁아서 무릎걸음으로만 다닐 수 있었고, 높은 지열과 석탄가루, 온갖 굉음이 광부들의 건강을 위협했다. 일할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광부들은 급속도로 보급된 탄광기계 때문에 일자리를 잃어버릴 처지에 놓여 있었다. 열악한 삶일망정 광부들의 삶에도 ‘아보하’가 분명 있었다. “특히 겨울날 저녁에 차를 마시고 난 뒤, 조리용 난로에선 불꽃이 춤을 추고, 난로 한쪽에선 아버지가 셔츠 차림으로 흔들의자에 앉아 경마 결승전 소식을 읽고, 어머니는 다른 한쪽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아이들은 1페니 주고 산 박하사탕 때문에 행복해하고….” 그마저도 일자리가 있는 사람의 이야기다.
사실 오늘을 사는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삶은 아보하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학생들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학교와 학원을 오가고, 직장인들은 쳇바퀴 돌 듯 똑같은 하루를 산다. 어쩌면 지루하고 권태로운 나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히라야마는 올드 팝에서,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에서 하루를 살아가는 힘을 얻었고, 1930년대 영국의 광부들은 고된 노동환경이었지만 차 한잔과 가족의 사랑으로 험악한 시절을 이겨냈다. 우리도 다르지 않아서 지루하고 권태로운 일상 속에서 반짝이는 그 무언가 하나로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럼에도 시절은 우리로 하여금 ‘아보하’를 살지 못하게 한다. 사회, 경제적 불평등은 소시민들의 삶을 옥죄고 있다. 각종 SNS에는 온갖 과시와 자랑이 넘쳐나면서 비교와 질투가 일상이 되었다. 결정적으로, 공정과 정의의 가치를 내걸고 어떤 자리에 오른 한 사람이, 정당한 법의 집행을 막아선 이 상황이 우리의 ‘아보하’를 빼앗고 있다.
추운 겨울에 길 위에 서서 새로운 시대를 염원하는 시민들이 다시 ‘아주 보통의 하루’를 회복할 수 있기를 새해 벽두, 간절히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