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세력이 한국을 비롯해 세계를 휩쓸고 있다. 극우가 우파인 이상 우파 일반의 속성을 지닌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파의 핵심은 프랑스혁명이 문을 연 민주공화정을 부정하는 것이다. 자유·평등·박애를 거부하고 권위·차등·시혜를 주장한다. 자유로워지려면 평등해야 한다. 평등한 사람 사이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신분제적 전통과 단절한 근대적 개인이 돼야 한다.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은 법과 같은 일반적 언어를 활용해 박애를 실천할 수 있다. 우파는 이에 정면으로 맞선다. 신분제적 전통 속에서 엘리트적 가치를 찾고 목표를 세워야 한다. 불평등은 자연스럽고 불가피할 뿐 아니라 사회에 이롭다. 평등은 허망한 유토피아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엘리트 지배자가 유순한 민중에게 시혜를 베풂으로써 위계적 결속을 만들어야 한다.
우파는 1920년대 말에서 1970년대까지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국가 주도 개발정책을 펼친 라틴아메리카의 군사 우파 정권이 대표적이다. 박정희의 군사 우파 정권도 이런 흐름 안에 있다. 1970년대 말부터 본격화된 신자유주의가 국가 대신 시장을 앞세우면서 군사 우파 정권이 퇴출당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성공하면서 역설적으로 우파를 극우로 되살려냈다. 신자유주의는 ‘경쟁을 통한 교환’ 기제에 사회적 삶을 종속시킴으로써 자유주의 가치와 제도의 안정성을 허문다. 사회 불평등이 커지는 것을 넘어 민족, 국가, 인종, 문화, 종교, 젠더, 환경 등 온갖 사회적 범주가 파편화되고 극심한 유동성에 노출된다. 들불처럼 번진 불안과 절망을 극우가 정치적 분노로 결집한다.
극우는 사회적 범주에 ‘순수한 원형적 정체성’이 존재한다고 선전한다. 이 정체성이 훼손돼 온갖 사회문제가 발생했다고 비난한다. 고도로 체계화된 이념을 중심으로 순수한 원형적 정체성을 되살리는 ‘정체성의 정치학’을 펼친다. ‘순수 국민’의 이름으로 이주자를 내쫓는 극우 민족·인종주의는 익숙한 터. 평등법상 보호받는 여성 범주에서 트랜스젠더 여성을 배제한 최근 영국 사례가 보여주듯 젠더 이슈까지 차지했다. “여성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다.” 연대의 손을 내미는 세력마저 원형적 정체성을 오염시키는 적으로 돌려 공격한다. 자기들끼리 통하는 특수주의 언어를 쓰며 분리주의를 추구한다.
작금의 극우 정치는 ‘파시즘’에서 ‘극단적 보수주의’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선거를 통해 집권을 추구하느냐가 둘을 가르는 결정적인 기준이다. 한국도 이 모습을 정확히 보여준다. 친위쿠데타를 저지른 윤석열과 법원을 습격한 폭도가 파시즘의 자리를 차지한다면, 내란 동조·실행 법 기술자 카르텔은 극단적 보수주의의 자리를 차지한다. 극우는 국면에 따라 파시즘과 극단적 보수주의 사이를 오간다. 선거로 뽑힌 대통령 윤석열은 군사적 폭력을 통해 영구집권을 꾀하며 파시스트로 돌변했다. 유력한 대통령 후보를 낙마시켜 국민의 선택권을 무력화하려 한 것이 아닌가 의심을 자초한 대법원도 언제든 파시즘으로 내달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가 싸우는 상대방이 극우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겉모습은 ‘보수’(conservatives)와 ‘진보’(liberals)가 선거 캠페인을 통해 집권을 추구하는 정상 정치 같지만, 아니다. 극우는 국민을 자유민주주의가 하향 평준화시킨 개돼지로 보고 ‘계몽’하려 든다. “어쭙잖은 시민 행세 그만두고 네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아가라!”
이번 대통령 선거는 일상적인 정당 정치가 아니라 극우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투쟁이다. 이번 기회에 보수가 극우와 단절해 민주공화국의 온당한 구성원으로 되돌아오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폭력이 아니라 정치의 공간이 지속해서 열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