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에 각성한 독일의 ‘부채 브레이크’ 해제

독일이 달라졌다. 16년 동안 단단히 잡고 있던 브레이크를 풀고 대규모 경기 부양의 시동을 걸었다. 독일 기독민주당(CDU)·기독사회당(CSU) 연합과 사회민주당(SPD), 녹색당은 지난 14일(현지시간) 인프라·국방 특별예산을 수립하기 위한 헌법(기본법) 개정 협상이 타결됐다고 밝혔다. 개헌 정족수(연방의회 재적의원 3분의 2)를 확보하면서 오는 18일 연방의회 본회의에서 개정안이 통과될 전망이다.
제대로 돈줄을 풀겠다고 나선 건 독일의 차기 총리가 유력한 프리드리히 메르츠 CDU 대표다. 경기 부양과 안보 강화를 위한 천문학적 규모의 인프라·국방 특별예산 합의안을 지난 4일 발표했다. 헌법 개정을 통해 정부의 차입 한도를 규정한 ‘부채 브레이크(Debt Brake)’에서 이들 예산을 예외로 하겠다는 게 합의안의 기본 골자다.
세계금융위기 이후인 2009년 만들어진 독일의 ‘부채 브레이크’는 재정적자를 국내총생산(GDP)의 0.35%로 단단히 붙들어맸다. 누적 적자가 GDP의 1.5%에 달하면 균형재정을 실시해야 한다. 재정 건전성을 위한 조치였지만 독일의 적극적인 재정 지출을 가로막는 걸림돌이었다. 독일 경제를 옥좨왔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독일, 하이퍼인플레 트라우마로
재정건전성 집착하며 엄격 관리
경제 침체와 관세 전쟁 직면하며
10년간 1조 유로 규모 투자 나서
연간 성장률 0.3~0.7%P 오를 듯
국가부채 늘고 금리 상승 우려도

이 브레이크를 푸는 특별 예산 합의안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다. 우선 국방비 지출 상한을 없앤다. GDP 1%를 초과하는 국방비 지출을 ‘부채 브레이크’에서 제외한다. 이렇게 되면 국채 발행을 통한 무제한 차입이 가능해진다. 두 번째는 향후 10년간 5000억 유로(약 791조원·독일 GDP의 12%) 규모의 인프라 투자 특별 기금 편성이다. 만성적인 투자 부족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다. 세 번째는 지방정부 재정준칙 완화다. 균형재정을 유지해야 했던 주정부도 연방정부처럼 연간 GDP의 최대 0.35%까지 추가 부채 부담을 허용키로 했다.
합의안대로 투자가 이뤄지면 향후 10년간 국방과 인프라 분야에 1조 유로(약 1583조원)의 재정이 투입될 예정이다. iM증권에 따르면 독일의 2024년 명목 GDP 규모는 약 4조3000억 유로(약 6805조원)고, 2024년 독일 연방정부 예산이 4657억 유로(약 737조원)다. 이를 감안하면 특별 예산안은 그야말로 ‘역대급’ 부양책이다. 시장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역사적인 패러다임 전환”(도이체방크)“완전한 게임 체인저”(뱅크오브아메리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유럽의 병자’로 전락한 독일 경제
균형재정에 대한 독일의 강박은 익히 알려진 바다. ‘하이퍼인플레이션’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 비용 조달과 패전 이후 전쟁 배상금 지급을 위해 국채 발행을 늘리고 무분별하게 돈을 찍어내면서 독일은 엄청난 물가 상승을 경험했다. 1923년 당시 1달러의 가치가 4조2000억 마르크에 이를 정도로 마르크화 가치가 급락했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의 고통이 나치의 등장 배경이 된 탓에 독일은 인플레이션에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다.

재정 건전성에 집착하다 보니 실제로 독일은 유럽연합(EU)의 재정준칙보다 더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왔다. EU 회원국은 재정적자를 GDP 대비 3% 이내, 국가부채를 GDP 대비 60% 이내로 제한해야 한다. 현재 독일의 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은 2.6%다. 독일의 지난해 GDP 대비 국가부채비율은 63%로 EU 다른 회원국과 비교하면 건전한 편이지만, 필요할 때 돈줄을 제대로 풀지 못했다.
독일이 이 같은 역사적 배경을 뒤로한 채 적자 재정을 통한 대규모 부양책으로 방향을 트는 건 경제 부진 때문이다. 독일의 경제성장률은 2023년(-0.3%)과 2024년(-0.2%) 2년 연속 마이너스에 머물렀다. 21년이다. 올해 성장률 전망치도 0%로 제자리걸음이다. 유럽 경제를 이끌던 기관차였던 독일이 ‘유럽의 병자’로 전락한 것이다.

제조업 강국인 독일에 수출 시장인 중국의 경기 둔화는 악재였다. 여기에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뛴 에너지 가격으로 전기료 등이 급등해 가계 소비 위축과 기업의 생산 원가 상승을 야기하며 경제에 직격탄이 됐다. 전기차로 대변되는 세계 자동차 시장의 변화에 독일 업체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데다 중국산 저가 제품의 공세도 독일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관세 폭탄을 쏘아 대는 미국과의 무역 전쟁도 독일 경제에는 불안 요인이다.
통화·재정 정책, 양 날개 단 독일
독일이 직면한 이런 사면초가의 상황으로 인해 경제 부양의 필요성은 커졌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예외주의’는 독일의 각성을 불러왔다. 그 결과 재정 모범생인 독일이 확대 재정으로 노선을 전환하는 ‘시대 전환’까지 이르게 됐다. 독일이 뒤처지는 산업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 대규모 투자를 동원한 극약처방을 불사한 이유다.
독일의 재정 확대 정책이 유럽 경제의 구조적 패러다임을 바꾸는 분기점이란 평가도 나온다. 삼성증권 허진욱 연구원 등은 최근 보고서에서 “독일 재정 정책 기조 전환은 2009년부터 이어져 온 ‘엄격한 재정 규율의 시대’의 종료를 의미한다”며 “2009년 ‘부채 브레이크’를 도입한 뒤 정부부채를 GDP 대비 60~70% 수준에서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성장과 공공투자를 희생해왔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으로 독일과 유럽이 통화와 재정 정책의 양 날개를 달게 됐다는 분석도 이어진다. 허 연구원은 “세계금융위기 이후 사실상 유럽중앙은행(ECB)의 통화정책이라는 단일 엔진에만 의존했던 유로존의 경기 대응이 재정 정책이라는 또 다른 엔진에 의해 보다 강력하고 안정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며 “독일의 균형 재정에 대한 ‘집착’은 유럽이 미국을 따라잡지 못하는 구조적 아킬레스건이었다”고 강조했다.
독일 재정 확대로 유로존 성장률 개선
아킬레스건을 떨어낸 독일의 부활에 대한 기대감은 커지고 있다. NH투자증권은 “인프라 투자 펀드와 지방정부 부채 증가가 유효 수요를 창출해 독일 경기 회복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현재까지 공개된 내용만으로도 연간 2000억 유로의 정부 지출이 추가로 늘어날 것으로 추산했다. 독일 거시경제·경기연구소(IMK)는 “부양책이 신속하게 집행된다면 올해 하반기 성장이 가속화할 것”이라며 “새로운 충격이 없다는 가정하에 향후 몇 년 안에 2%의 성장률을 달성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성장률 전망치도 상향 조정되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0%에서 0.2%로, 2026년 전망치는 1.0%에서 1.5%로 높여 잡았다. 삼성증권은 독일의 재정 확대가 향후 수년간 독일의 연간 성장률을 0.3~0.7%포인트 높일 것으로 예상했다. 독일이 유로존 전체 GDP의 30%를 차지하는 만큼 독일 경제의 순항은 유로존 성장률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다. 국제금융센터는 독일 재정 확대가 유로존 내 주변 국가에도 긍정적인 영향으로 전이돼 유로존의 GDP가 0.4%포인트 상승하는 효과가 생길 수 있다고 예상했다.
문제는 대규모 재정 투입이 가져올 부담이다. 지난해 63%인 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의 상승은 피할 수 없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독일이 매년 GDP의 1.5%를 추가로 지출하면 정부 부채는 2029년 GDP의 70%까지 높아질 것으로 추산됐다. 프리드리히 하이네만 유럽경제연구센터(ZEW) 이코노미스트는 독일의 GDP 대비 부채비율이 2034년 100%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했다.
독일 금리 상승, 주변국으로 번질 듯
독일 재정 지출 확대는 세계 금융 시장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재정 지출을 늘리기 위해 독일이 국채(분트) 발행을 늘리면 채권값은 떨어지고 채권 금리는 뛴다. 실제로 대규모 부양책이 발표된 이튿날인 지난 5일 독일 10년물 국채 금리는 하루 만에 0.31%포인트 급등하며 1997년 이후 28년 만에 가장 큰 상승 폭을 기록했다. 헌법 개정 협상이 타결된 지난 14일에 독일 10년물 국채금리는 2.88%에서 2.93%로 상승했다. 골드만삭스는 향후 분트 금리가 추가 1% 상승할 수도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분트 값과 금리가 움직이면 유로존 국가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 등의 국채 가격과 금리도 영향을 받게 된다. 공동락 대신증권 연구원은 “유로존 지역의 국채 시장은 사실상 독일이 일종의 벤치마크 역할을 담당한다”며 “독일 대비 금리가 가산되는 형태로 다른 국가 국채 금리가 형성되는 만큼 독일 (국채) 금리 상승은 다른 국가 금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했다.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우려도 커지면서 유로존의 통화정책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로베르트 홀츠만 오스트리아 중앙은행 총재는 독일 경제매체 플라토브리프와의 인터뷰에서 “관세와 유럽 재무장, 독일 부채 규정 완화 등으로 물가가 다시 뛸 위험이 커졌다”며 ECB가 금리를 다시 올려야 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