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른의 관계맺기](41) 관계의 늪에서 나를 건져 올리다

2025-12-05

직장 다닐 적 일요일에도 출근했다. 할 일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휴일에 나가 상사와 점심을 같이하면, 평소 그가 해주지 않는 말을 시시콜콜 해주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이 사람이 나를 싫어하진 않는구나’ 안도했다. 휴일에 출근하지 않으면 월요일이 끔찍할 만큼 두려웠다. 당시는 토요일도 일하는 시대여서 상사와 일요일 하루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도 월요일 아침에 만나는 상사가 무척 낯설었다. 나는 낯섦이 싫었다.

내 말을 잘 들어주는 상사와 일한 적도 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너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하느냐?’, ‘도대체 그런 얘기는 어디서 듣느냐?’라며 놀라워했다. 나는 어느 땐가부터 그에게 할 말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일요일에도 좋은 생각이 나면 월요일 아침 일찍 출근해 그를 기다렸다. 그가 출장을 가면 동료들은 ‘상사가 자리를 비웠다’라고 좋아했지만, 나는 허전했다. 그 감정은 어릴 적 외할머니와 살던 시절, 할머니가 서울 사는 외삼촌 집에 다녀오는 동안 느꼈던 울적하고 허탈한 느낌 같은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관계중독’이었던 듯싶다. 관계중독은 1928년 헝가리 정신분석가인 산도 라도(Sandor Rado)가 처음 언급한 개념으로, 특정인과의 관계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행위 중독의 일종이다. 관계중독은 단순히 사람을 좋아하거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차원을 넘어선다. 건강한 관계는 각자의 온전함이 전제되는 반면, 관계중독은 한쪽이 다른 쪽에 완전히 용해되거나 상대의 기분과 행동에 내 삶의 주권을 맡겨버리는 형태를 띤다. 우리는 이런 패턴을 헌신적인 사랑이나 숭고한 희생으로 오해하곤 한다. 그러나 그 본질은 내면의 깊은 불안에서 비롯된 병적인 의존 관계다. 사람은 누구나 관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어느 순간부터 관계가 나를 성장시키기보다 나를 옭아맨다는 생각이 들 때 이미 건강하지 못한 늪에 빠진 것이다.

내가 관계중독이라고 단정할 만한 근거는 많다. 우선 나는 과도하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 내가 누구인지보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보는지가 삶의 중요한 척도가 되어 왔다. 늘 남의 눈치를 보고 다른 사람의 표정이나 태도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부족해 다른 사람의 칭찬이나 인정을 갈구하고, 타인의 평가 같은 외적 요소에 기대 나 자신의 가치를 평가한다. 내 고유의 본질가치보다 사람들이 평가하는 상대가치를 더 중시한다고 해야 할까?

나는 스스로 상대의 감정 관리자 역할을 자임한다. 같이 있는 친구의 기분이 좋지 않으면 마치 내 잘못인 양 불안하고, 그 감정을 회복시키기 위해 애쓴다. 어떻게든 상대의 비위를 맞추지 않으면 관계에 금이 갈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더 친절해지고, 더 민감해지고, 더 성실해지고자 노력한다.

아내와 말다툼이라도 할양 치면 관계가 안 좋아질까봐 전전긍긍한다. 갈등을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내 목소리를 누르고 상황을 무마하고자 급급하다. 그렇다면 아내와 떨어져 있는 시간에는 평온함을 누려야 할 텐데, 혼자 있는 시간도 잘 견디지 못한다. 아내가 해외여행을 떠나 일주일 넘게 곁에 없으면 극심한 공허감으로 두렵기까지 하다.

관계에 집착하는 밑바닥에는 결핍과 두려움이 있다고 한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예측 가능하고 안정적인 보살핌을 받지 못했거나, 반대로 과잉보호를 받은 경우에 이후 성장 과정에서 ‘관계가 나빠지면 위험해져’, ‘혼자 남지 않기 위해서는, 거절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해’, ‘내가 사람들의 기분을 맞춰줘야 관계가 유지될 거야’ 같은 생존 전략을 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관계 중독자들의 심리를 가장 단적으로 표현하는 문장이 있다. ‘혼자 남는 것이 두려워 함께 있는 고통을 선택한다.’ 이쯤 되면 관계는 서로를 비추는 창이 아니라 나의 가치를 확인받기 위한 거울이 된다. 그 거울이 깨질까봐 필사적으로 상대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쓴다. 이렇게 애쓰는 감정은 우울로 전환되고, 우울은 다시 관계중독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을 만든다.

관계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가 찾은 방법이 있다. 그것은 나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다. 내 생각과 느낌과 경험을 일기 형식이나 편지체로 써보고, 살아온 시간순으로도 적어본다. 내게 일어난 사건이나 나를 둘러싼 관계 중심으로도 써본다. 이를 통해 내 삶의 궤적을 더듬어보고, 그 궤적에 얽힌 일화와 사건들을 재해석해보는 것이다.

관계중독의 아이러니는 줄이거나 끊으려고 하면 오히려 더 강해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굴레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은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나는 나에 관해 쓰면서 과거의 나와 만나고 내 과거를 복원했다. 내가 왜 그때 그랬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난 삶을 새롭게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묻혀 있던 나를 찾아냈다.

관계의 늪에서 벗어나는 또 다른 방법은 독서와 사색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를 둘러싼 관계와 적정 거리를 두게 됐고,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관계중독자들이 불안한 이유는 안정적인 정체성을 갖지 못해 모든 기준을 타인에게 맞춤으로써,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른 사람에 비해 자신이 뒤처진 건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독서와 사색은 자신을 인식하고 인정하게 만든다.

결국 단단한 삶은 ‘누가 나를 좋아하는가’보다 ‘내가 나를 온전히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관계중독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세상과 담을 쌓고 혼자가 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잃지 않는 건강한 관계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일이며, 나 자신에게도 사랑을 줄 수 있는 용기를 회복하는 여정이다.

글쓰기, 책 읽기와 함께 나를 찾기 위해 실행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먼저, 환갑을 넘기면서부터는 혼자 있고 싶을 때 홀로 있겠다고 말한다. 혼자 산에 가고 영화도 보러 간다. 처음에는 아내가 무슨 일 있느냐고 걱정했지만, 지금은 당연하게 여긴다.

또 하나, 주변의 부탁이나 요구에 당당하게 거절하기 시작했다. 내가 싫으면 ‘싫다’, ‘아니다’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다만 아내에게 치우쳐 있는 과도한 의존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직 풀어야 할 숙제다. 아내의 말 한마디 작은 행동 하나에 내 기분이 심하게 영향받고, 아내 없이는 밥 한 끼 차려 먹을 줄 모르며, 음식물 쓰레기도 처리하지 못하는 병적인 상태에서 독립하기 위해 분투 중이다.

끝으로, 다른 사람에게 거는 기대를 대폭 낮췄다. 내가 무언가를 바라고 아내에게, 아들에게, 친구에게 기대하면 그 기대가 관계의 족쇄가 되어 기대가 클수록 관계에 더 집착한다. 역설적이게도 기대를 낮추면 오히려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장자(莊子)의 통찰처럼, ‘가장 완벽한 인간관계는 서로 필요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있는 관계’다. 그런 관계는 서로 붙잡지 않아도 서로에게 오래 머문다.

관계는 필요하다. 그러나 관계가 우리의 모든 것을 결정하게 둘 필요는 없다. 좋은 관계는 나를 소모시키지 않는다. 관계를 통해서만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불안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 더 나다워져도 괜찮다는 여유와 자유를 준다.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는 타인과의 관계가 아닌, 나 자신과의 관계다. 아무리 그럴싸해 보이는 관계도 어느 일방의 승인과 인정에 기대 맺어진 관계, 자신을 불신하는 관계는 위태롭기 짝이 없다.

아내가 또 주방에서 ‘밥 차려놨는데 뭐 하느냐?’고 고함을 지른다. 내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벗어나야 한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