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곳곳 흩어진 왕씨 자손들…그들이 유대를 이어가는 법 [왕겅우 회고록 (25)]

2025-12-05

가족-친척들 / Family

다시 뵌 할아버지는 건강이 좋으셨다. 말씀이 적고 표현을 아끼셨지만 우리를 보고 기쁘신 마음은 분명했다. 아버지의 격한 감정은 이해가 갔다. 특히 할머니 돌아가실 때 곁에 있지 못한 것에 대해. 할아버지에게는 착한 아들답게, 그것도 오랜만에 멀리서 돌아온 아들답게 공손하셨다. 두 분끼리 얘기 나누신 일이 몇 번 있고, 어머니에게 내용 일부를 전해 들었다. 그 지방을 휩쓴 여러 차례 전쟁 중 잃어버린 재산과 문중 토지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그 지방이 공산당 편인 신4군(新四軍)의 통제 아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외할머니 산소에 간 기억이 없다. 안전 문제 때문에 안 갔을지 모른다. 제사는 친척들이 집에 모여 지냈다.

아버지는 숙부님과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 두 분 사이에 중간 숙부님이 계셨는데 부부가 모두 일찍 돌아가시고 아들 둘 딸 하나가 할아버지에게 남겨졌다. 작은 숙부님도 아버지처럼 돈 벌러 타지로 나갔는데, 그분은 홍콩이었다. 그곳에서 결혼해 살다가 전쟁이 닥치자 처자를 이끌고 내륙으로 피신해 광시와 후난에서 전쟁 기간을 지냈다. 전쟁 후에는 상하이에서 일하며 타이저우에 데려다 놓은 가족에게 생활비를 보냈다. 전쟁 후 아버지가 말라야에서 보낸 돈도 도움이 되었다. 총체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고모님이 가까이 계신 것이 다행이었다.

판(潘)씨 집으로 시집간 고모님의 남편은 아버지의 학교 친구였는데 난징의 금릉(金陵)대학을 나오고 아버지를 포함해 왕씨 집 3대가 근무한 일이 있는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널리 존경받고 잠깐 학교의 교장 서리도 지낸 분이었다. 판씨 집은 그 지역의 오래된 집안으로, 왕씨 집안을 도와준 일이 많았다. 두 아들이 멀리 가 있고 손자 손녀 셋을 돌보시는 할아버지가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는 데 그 도움이 컸다.

우리가 갔을 때도 고모부는 그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북경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한 그분 아들은 나중에 그 학교 교장을 지냈다. 2002년 그 학교 졸업생 후진타오가 중국공산당 총서기와 중화인민공화국 총통이 되자 지역민의 자부심이 한껏 높아진 가운데 학교 교사(校史)가 새로 편찬되었다. 그곳에서 가르치거나 공부한 집안사람들의 이름이 거기 실려 있었다. 아버지 이름에 착오가 있어서 짚어주었더니 정정을 약속했다.

1947년 우리가 갔을 때 타이저우에 왕씨 집안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종조모님들, 아저씨들, 종형제들을 많이 만났다. 사진 한 장이 남아있다. 할아버지와 우리 세 식구, 숙부님 세 식구, 고모님, 중간 숙부님 아이들 셋, 그리고 할아버지의 사촌인 종조부님 한 분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진 속의 종조부님이 재미있는 분이다. 가문 전통에 따라 “십삼야(十三爺)”라 부른 분이다. 어머니 설명에 따르면 할아버지 세대의 남자 사촌이 열네 명이었다. 할아버지는 그중 셋째였고 종조부가 열세 분이었다는 말씀이다. 열네 분 중 몇 분이 살아 계셨는지 모르겠는데, 아기 때 죽는 일이 많았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할아버지의 친동생 둘은 일찍 돌아가시고 남기신 아저씨 하나가 교통대학에서 수리공학 공부를 하는 것을 상하이에서 만난 일이 있다.

종조부 중에 할아버지와 제일 가까웠던 것이 열째와 열셋째로 형제간이었다. 십삼야는 지역 학교의 교사였고, 그분 외동딸을 상하이에서 만났었다. 공교롭게 그 숙모님은 딩씨와 결혼했는데, 어머니의 수많은 집안 오빠 중 한 분의 손자였다. 그래서 겹사돈 관계인 셈이다. 지역의 행세하는 집안들이 서로 어떻게 얽혔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몇 해 전 돌아가신 십야(十爺) 할아버지는 집안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었다. 그분 부친 왕레이샤가 1901년에 주일본대사관의 중국 유학생 담당으로 파견될 때 데려갔다. 생물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우창(武昌)고등사범학교를 비롯한 여러 학교에서 가르쳤다. 왕레이샤 종증조부님은 학식으로 명망 있는 분으로, 청나라가 무너질 때까지 여러 교육기관을 주재하셨다. 아버지는 그분에게 유가 경전을 배우고 서예도 그분 필치를 따랐다.

십야 할아버지의 부인은 사진에서 빠졌다. 그분을 나중에 만났을 때 아드님 두 분과 따님 한 분이 모두 해외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말씀을 들었다. 세 사람이 모두 내가 들어가려는 국립중앙대학의 졸업생이어서 그 향로에 관심이 많이 갔다. 1947년에 아들들은 미국에 있었다. 형인 로원(雒文)은 화학자로 사탕무우를 연구했고 아우 야원(雅文)은 기계공학을 공부하고 자동차를 연구했다. 딸 헝원(蘅文)은 부친을 따라 생물학을 공부하고 의과대학 졸업 후 취리히대학에서 세포생물학 연구를 하고 있었다. 셋 다 공산화 이후 중국에 돌아왔다가 문화혁명 때 해외 관계로 고난을 겪었다. 다행히 덩샤오핑 개혁 후 모두 복권되어 로원 아저씨는 창춘기술대학 총장까지 지냈다. 헝원 고모님은 상하이에서 연구 활동으로 생리병리학 분야의 명성을 얻고 실험종양학과 암과 환경의 관계에 관한 책들을 냈다.

야원 아저씨를 제일 잘 알게 되었다. 1980년 만났을 때는 자기 공장에 아들의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은퇴해 있었다. 그래서 1980년대 자동차산업 발전에 참여하지 못했고 아들은 일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기 때문에 조기 퇴직을 후회하고 있었디. 딸들은 잘 풀렸다. 하나는 회계사가 되었고 학문의 길로 나아간 또 하나는 난카이대학 역사 교수가 되어 명청대 희귀본의 분석과 주석에 종사했다.

왕씨 자손은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 중국의 친척들과 관계가 흐려지고 있다. 정딩의 본가에서 그들을 찾아내 중국 내의 기록에 넣으려고 애쓰는 것이 흥미로운 일이다. 어떤 성과를 거둘지 예측할 수 없지만, 중국 안에서나 밖에서나 유대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의 한 사례일 것이다. 그런 노력이 전통적 가족관계의 가치를 되살려내려는 국가적 노력으로 계속되어 중국 문화의 특색을 회복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을 기대한다.

[Wang Gungwoo, 〈Home is Not Here〉(2018)에서 김기협 뽑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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