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5일 금요일 밤에 아버님께서 향년 74세 나이로 돌아가셨다. 호흡기 달았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 날이었다. 아버님은 당뇨로 신장 투석을 십몇 년간 하셨다. 작년 여름부터는 거동이 어려워 요양병원에 들어가셨다. 병원 신세를 진 후로는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셨다. 아버님 본인이 올해를 못 넘길 거 같다고 말씀하셨다. 발가락이 썩기 시작했고 방광 문제에 욕창까지 생겼다. 음식을 먹을 수도 없어서 콧줄을 다셨다.
올해 추석에 가족들이 다 함께 병원 면회를 갔다. 이것이 마지막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는지 우리는 가족사진을 찍었다. 그래도 그때는 아버님이 눈도 뜨고 나지막이 대답도 하셨다. 그 뒤로 남편이 한 번 더 아버님을 찾아뵙고 눈물로 인사를 나누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날, 저녁에 호흡이 불안정하다는 전화를 받았다. 우리는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게 짐을 쌌다. 다시 전화가 왔을 때는 호흡이 괜찮아졌다는 소식이었다. 그러고 한 번 더 전화가 왔을 때 남편은 얼굴을 감싸고 울었다. 아빠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본 큰애가 따라 울었다. 남편이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오지 않았다면 임종을 지키기 못한 마음이 무거웠을 거다.
시댁은 아들만 둘이고 남편이 맏이다. 교회 다니는 집안인데 분위기는 절간이다. 남편과 결혼 얘기가 나오면서 인사드리러 갔던 날이 기억난다. 양식집에서 식사하고 집으로 갔다. 아버님이 사진첩을 꺼내 보여주면서 선교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남편이 중고등학생 때 아버님은 일을 정리하고 중국에서 북한 선교를 하셨다고 한다. 남편에게는 그 시절 기억이 아버지의 부재로 남아있다. 어머님에게도 남편 없이 시어머니 모시고 한창 커가는 아들 둘과 지내야 했던 시간이었다. 아버님은 본업으로 돌아온 후에도 선교에 힘쓰셨다. 타국에 지은 교회 기둥에 아들 둘 이름을 새기셨다. 당시 함께했던 선교사님이 장례식장에 오래 머물다 가셨다.
남편의 할아버지는 북한에서 온 군의관이었다. 할아버지는 아버님이 국민학교 다닐 적에 돌아가셨다. 생전에 무척 엄하셨기 때문에 아버님은 할어버지가 돌아가신 날 기뻐서 친구들에게 돈을 뿌렸다고 한다. 남편의 할머니는 어렸던 아버님을 친척들 손에 맡기고 혼자 서울에서 간장 장사를 했다. 할머니는 체격도 크고 여장부 스타일이었다. 지금의 영남대학교 부지를 소유할 만큼 부자였는데 친척들한테 야금야금 돈이 새면서 단칸방 신세가 됐다고 한다.
시댁에 처음 인사드리고 나오는데 아버님께서 슬리퍼를 신고 급히 따라 나오셨다. 내 손을 잡으시더니 “너는 우리 집에 며느리가 아니라 딸로 오는 거다”라고 말씀하셨다. 시댁에 갈 때면 아버님은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기억했다가 사 놓으셨고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고 하셨다. 신혼 때 방 하나가 시댁에서 가져온 걸로 가득 찰 정도였다. 남편과 주말부부였던 때 출산이 겹쳐서 산후조리가 고민이었는데 시댁에서 하라고 권한 것도 아버님이었다. 덕분에 산후 후유증이 없었다. 작은애를 입양할 때, 아버님이 “혈연을 보고 싶은 마음이야 있지만 너희 뜻이 그렇다면 존중한다”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작은애가 항암치료를 받을 때, “00이가 우리 집에 오길 잘했다, 그치?”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씀하신 게 아직도 감동으로 남아있다.
아버님은 사회복지 분야에서 정년을 채우셨다. 이틀에 한 번씩 투석 받으면서도 끝까지 일하셨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상도 받으셨다. 퇴직 후에 폐물이 된 것 같다고 우울해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복지관 관장이었다가 집에 있으려니 상실감이 크셨을 거 같다.
나는 아버님과의 기억을 글로 남기면서 애도하고 있다. 장례를 치르고 와서 남편이 덤덤하게 말한다. “이제 우리 둘 다 아빠가 없네.” 부부는 하늘 아래 아빠가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
김윤경 글 쓰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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