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호의 시선] 전략이 실패했지만, 웃은 오라클

2024-09-19

지난 9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오라클 클라우드 월드 2024(이하 OCW2024)’ 기조연설 무대에 래리 엘리슨(Larry Ellison) 회장이 올랐다. 그의 표정은 여느 때보다 밝게 느껴졌다. 아마 같은 날 발표된 오라클의 실적 때문일 것이다.

오라클은 올해 회계연도 1분기(6~8월) 매출 133억달러(한화 약 17조8500억원), 영업이익 40억달러(약 5조3700억원)를 기록했다. 각각 전년 동기보다 7%, 21% 늘어난 수치를 기록하면서 시장의 기대를 훌쩍 뛰어넘었다. 다음날 미국 증시에서 오라클의 주가는 11%나 뛰었다. 주가 급상승 덕분에 엘리슨 회장의 자산이 빌 게이츠를 넘어섰다는 보도도 나왔다.

엘리슨 회장을 웃게 만든 어닝 서프라이즈의 배경에는 클라우드가 있었다. 오라클 클라우드 부문 매출은 21% 증가한 56억달러였다. 전체 매출의 절반 가까이가 클라우드에서 나왔다.

무기가 되지 못한 오라클 DB

그동안 클라우드는 오라클과 같은 전통적 소프트웨어 기업의 고민거리였다. 오라클 DB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수 많은 시스템과 고객이 있지만 세상은 점점 클라우드 중심으로 옮겨갔다. 구축형(온프레미스) DB 분야에서 오라클은 최강자였지만, 클라우드 시장에서는 새로운 도전자에 불과했다. AWS, 마이크로소프트 애저, 구글 클라우드 플랫폼(GCP) 등이 세상을 장악해 가는 것을 지켜만 보다가는 DB의 존재감마저 무너질 가능성이 있었다.

오라클의 초기 전략은 DB를 지렛대로 클라우드 시장을 먹어치는 것이었다.

“오라클 DB 쓰고 싶지? 그러면 오라클 클라우드(OCI)를 쓰도록 해”

이것이 오라클의 메시지였다. 이 전략의 일환으로 AWS 등에서 구동되는 오라클 DB의 라이선스 가격을 인상했다. OCI를 이용하면 더 저렴하게 오라클 DB를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오라클의 뜻대로 고객들이 AWS나 애저를 버리고 오라클 DB를 위해 OCI를 선택했을까? 세상은 오라클의 뜻대로만 움지이지는 않았다. 오라클 DB를 이용하기 위해 OCI를 선택하는 고객도 있었지만, AWS나 애저 클라우드를 이용하기 위해 오라클 DB를 포기하는 고객도 다수 있었다. 오라클 DB를 무기로 이용하려던 오라클의 전략은 성공했다고 볼 수 없게 됐다.

오라클은 변해야 했다. 오라클 DB를 지렛대로 클라우드 시장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오라클은 외부 클라우드 시장으로 오라클 DB가 뛰어 드는 전략을 선택했다. 오라클 DB는 어느 클라우드에서라도 환영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OCW 2024는 오라클 DB 지렛대 전략 포기 선언처럼 느껴지는 행사였다. OCW 2024를 관통한 주제는 ‘멀티클라우드 ’였다. 꼭 자신들의 클라우드를 단독으로 쓰지 않더라도 이미 시장에 뿌리내린 타사 클라우드로 외연을 확장하는 전략을 의미한다.

오라클은 AWS, 구글클라우드플랫폼(GCP), 마이크로소프트 애저(Azure)까지 아우르는 클라우드 ‘빅3’ 동맹을 선언했다.

래리 엘리슨 회장은 “다양한 기업의 기술을 우아하게 결합한 개방형 시스템의 시대, 이제 서로 다른 서비스가 원활하게 작동하는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핵심은 협력을 통한 멀티 클라우드 지원이다. 자사 DB의 넓은 외연을 살리면서 타 클라우드 업체 사용자들을 끌어들이는 전략이다.

AWS와의 협업이 핵심이다. 빅3로 묶이는 클라우드 3사 가운데서도 AWS의 위상은 절대적이다. 이미 애저에서 오라클 DB 사용이 가능한 서비스 ‘오라클 DB 앳 애저’를 출시했던 회사는 이번에 AWS와도 손을 잡으면서 클라우드 동맹을 가속화했다.

오라클 DB를 AWS와 연결하는 ‘오라클 DB 앳 AWS’ 공식 출시를 알렸다. 오라클 DB에 있는 데이터를 아마존 엘라스틱 컴퓨트 클라우드(Amazon EC2), AWS 애널리틱스(Analytics) 서비스, 아마존 베드록(Amazon Bedrock) 등 AWS 솔루션에 연결할 수 있는 서비스다.

AWS 데이터센터에 오라클 DB 23AI를 연결함으로써 익숙한 클라우드를 쓰면서도 오라클 DB의 데이터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 AWS만 쓰던 고객이라면 AWS 마켓플레이스에서 오라클 DB 서비스를 선택해 사용하거나, 오라클 DB만 썼던 사용자라면 오라클 라이선스를 통해 AWS 서비스 할인 혜택을 누릴 수 있다.

GCP와도 손을 잡은 것도 흡사한 맥락이다. ‘오라클 DB 앳 구글클라우드’서비스도 이번 OCW를 기점으로 공식 출시했다. 오라클의 DB와 연동한 GCP 서비스를 통해 새로운 클라우드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AWS 협력과 마찬가지로 기존 GCP 계정으로 오라클 DB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고 기존 오라클 라이선스를 활용하는 방안 모두 가능하다.

애저에 이어 AWS와 GCP까지 품으면서 빅3 동맹을 완성한 오라클은 클라우드 기업으로의 약진을 기대한다. 고객들이 여러 클라우드를 섞어쓰는 멀티 클라우드 시대에 빨리 적응하도록 하고, 회사 차원에서는 온프레미스 DNA가 강한 ‘올드 플레이어’ 이미지를 지운다.

후발주자로서 확실히 넘어서지 못할 거면 같이 가겠다는 의지다. “오라클 DB를 클라우드에서 쓴다”는 트렌드가 뿌리내리면 온프렘 DB 고인물 이미지를 지울 수 있다. 반대로 AWS와 마이크로소프트, 구글은 오라클 DB라는 확실한 기능 하나를 더함으로써 더 많은 선택지를 제공할 수 있게 됐다.

미니 데이터센터 지원하는 OCI

하지만 뭔가 찜찜하다. 오라클은 이미 OCI라는 자체 클라우드 서비스가 있다. 빅3의 우산을 활용하는 이번 방안은 OCI 외연 확장에 한계를 두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낳는다. OCI 신규 사용을 고려하던 이들도 그냥 AWS·구글·애저 같은 익숙한 클라우드 인프라를 계속 사용하게 하는 효과가 있어서다. 지금 쓰는 클라우드에서도 오라클 DB의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으니 굳이 OCI로까지 옮겨탈 이유를 찾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오라클도 이를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OCI만의 고유 서비스를 개발했다. 엔터프라이즈급 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 등 새롭게 클라우드 사용을 고려하고 있는 이들을 위한 서비스다.

이번 OCW에서는 OCI 전용 리전을 구성할 수 있는 분산형 클라우드 서비스 ‘리전(Region 25)’의 청사진을 발표했다. 단 3개의 랙만으로도 데이터센터를 구성해 쉽고 빠르게 OCI 전용 리전을 세울 수 있다. 서비스 출시 시점은 빠르면 내년이다. 특정 업무 환경에 특화한 미니 데이터센터를 구축함으로써 퍼블릭 클라우드 사용을 고려하고 있는 중소기업이나 작은 규모의 스타트업까지 OCI 고객으로 유치할 수 있다.

AI 슈퍼컴퓨터도 OCI만의 자랑이다. 오라클은 엔비디아의 최신 그래픽처리장치(GPU) 블랙웰(Blackwell) 13만1000여개를 심은 AI 슈퍼클러스터 개발을 마쳤다. 오라클에 따르면 AI 슈퍼클러스터는 다른 하이퍼스케일러 대비 6배 많은 GPU를 적용했다. 많은 기업이 AI 모델 훈련에 난항을 겪는 상황에서 OCI 내에서 구동하는 이 슈퍼클러스터를 찾을 거라는 게 회사의 기대다.

자체 거대언어모델(LLM)을 보유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LLM을 훈련시키는 데 자신들의 클라우드 인프라가 십분 활용될 것으로 기대한다. 전세계 162개의 클라우드 데이터 센터가 있는 만큼 지역을 가리지 않고 AI 모델 훈련을 지원할 수 있다는 게 오라클의 메시지다.

오라클 직원들은 이제 DB 기업보다 클라우드 기업이라는 표현을 더 자주 쓴다고 한다. 이번 OCW는 그 변화를 더 체감할 수 있었다는 평이다. 주가가 절대 지표는 아니지만 행사 이후에도 상승세가 이어지는 것도 증거 중 하나다. 실적 발표 내용을 뜯어보면 예약된 계약 매출을 의미하는 ‘성과의무(RPO)’ 액수 또한 990억달러(약 132조800억원)에 달한다.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이제는 클라우드로 매출 절반 가까이를 내는 기업. 오라클의 변화는 일단 순풍이 부는 모습이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이진호 기자>jhlee26@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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