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등고자비(登高自卑)

2025-10-23

'등고자비(登高自卑)'.

'높은 곳에 오르려면 낮은 곳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의미다. 중용(中庸) 제15장에 등장하는 이 말은 '모든 일은 순리에 따라 절차를 지켜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세상만사에는 순서가 있다는 얘기다.

누가 봐도 당연한 진리를 서두에 내민 까닭은 요즘같이 기술이 급변하는 시대일수록 그 의미를 되새기는 게 중요함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인공지능(AI) 산업을 살펴보자. 이재명 대통령이 'AI 세계 3대 강국'을 1호 공약으로 내걸면서 AI가 블랙홀처럼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고 있다.

산업 정책은 온통 AI 기술·서비스 개발과 산업 육성에 집중됐다. 정부는 그래픽 처리장치(GPU) 확보에만 수조원을 쏟아붓는다. 독자 AI 모델 개발, 독자 AI 특화 모델 개발 등 여러 프로젝트가 동시에 진행된다. 공무원 사이에서는 어떤 사업이든 'AI'란 용어가 안 들어가면 예산 담당자가 거들떠도 안 본다는 푸념 섞인 얘기도 나온다.

그런데 우리 기업들은 과연 AI를 받아들일 준비가 됐을까? 우리나라 기업의 99%는 중소기업이다. 중소기업 보유 데이터는 대부분 비정형 데이터다. AI가 학습을 통해 해당 기업을 위한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이런 데이터의 정제가 필요하다. 데이터 형식·구조가 제각각이어서 AI 모델에 통합하기 어려운 것도 문제다. 이 같은 선처리 작업을 완료한 기업은 많지 않다.

클라우드 도입률도 낮다. 액샌츄어 등 글로벌 기업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중소기업의 클라우드 기술 도입률은 30% 안팎으로 추정된다. 클라우드는 AI 모델을 효율적으로 구축·운영·제공하는 데 필요한 기반이다. 간단한 AI 에이전트 도입이라면 모를까, 장기적인 AI 혁신에는 클라우드 체계가 필수다.

결국 우리 기업 상당수가 아직 AI를 도입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디지털전환(DX)도 없이 바로 AI 전환(AX)으로 넘어갈 수는 없다. 영재가 아닌 평범한 초등학교 3학년에게 바로 중학교 과정을 교육시키는 꼴이다.

소프트웨어, 클라우드, 보안 등 공공 DX 관련 사업이 축소되고 예산이 삭감되는 것은 이 같은 우려를 더 키운다.

세계적 흐름이기에 AI 기술 개발 투자는 불가피하다. 기술 발전 속도가 점차 빨라지기 때문에 잠시라도 손을 놓았다간 선도국에 한참 뒤처지거나 오랜 기간 따라잡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이미 미국, 중국과 격차도 크다.

하지만 진정한 AX, AI 네이티브 구현을 원한다면 기본적으로 DX가 뒷받침돼야 한다. 중소기업들이 DX를 먼저 추진할 수 있도록 정책과 예산 지원의 고삐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AX 사업을 기획할 때 데이터 확보, DB 정제, 클라우드 기반 구축 등 DX 사업을 편성해 끼워 넣는 게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모든 일은 순리에 따라 진행돼야 한다. 급하다고 이를 무시하면 오히려 더 안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 DX와 AX가 효과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정책과 예산 집행의 묘를 발휘해야 한다.

안호천 기자 hca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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