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지 배우기 위해 평생을 보낸다.’ 비극적 최후를 맞았던 로마의 정치인 겸 사상가 세네카(Seneca)는 인생을 이렇게 요약했다.
이번 사자성어는 만인지적(萬人之敵. 만 만, 사람 인, 갈 지, 대적할 적)이다. 앞 두 글자 ‘만인’은 ‘사람 만 명’이다. ‘지적’은 ‘대적이 가능할 정도’라는 뜻이다. 이 두 부분이 합쳐져 ‘만 명을 한꺼번에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세다’라는 다소 과장된 의미가 만들어진다. 비슷한 표현으로 ‘일당백(一當百)’, ‘일기당천(一騎當千)’, ‘만부부당(萬夫不當)’ 등이 쓰인다.
중국에서 ‘만인지적’으로 평가받은 인물 가운데 항우(項羽)와 여포(呂布)가 특히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가 출중했다. 장신(長身)에 긴 수염이 인상적인 관우(關羽. 162~220)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힌다.
관우는 십상시(十常侍)가 국정을 농락하던 후한(後漢) 말, 산시(山西)성 윈청(運城)에서 출생하고 성장했다. 윈청에는 대규모 소금 호수 시에츠(解池)가 있다. 그는 횡포를 부리던 하급 관원 신분의 토호를 살해하고 10대 후반 황급히 고향을 등졌다. 이후 21살 때, 지금 베이징에서 서남쪽으로 약 4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줘저우(涿州)에서 유비(劉備. 161~223)와 장비(張飛. ?~221)를 우연히 만났다. 의기투합한 셋은 평생 고락을 함께할 것을 맹세하고 의형제가 됐다.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자 황실의 먼 종친인 유비가 거병하고 의병 활동을 시작했다. 22세의 관우도 장비와 함께 동참해 황건적 토벌에 동분서주했다. 황건적 토벌이 끝나고 조조, 손견, 여포 등 천하를 손에 넣으려는 신흥 군벌들의 엎치락뒤치락 다툼이 벌어진다. 이 와중에 세력이 약한 유비가 대패하고, 38세의 관우는 조조의 포로 신세가 됐다.
평소 관우의 기개와 인품을 높이 평가하던 조조는 관우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 좋은 기회로 판단했다. 호화로운 저택에 연금한 후, 귀빈에 버금가게 예우했다. 적토마(赤兎馬)를 선물하고 진귀한 보배도 수시로 보냈다. 하지만 관우는 대패하고 연락이 끊긴 유비의 거처가 확인되면 언제든 떠나겠다는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한 전투에서 관우는 약 50kg 무게의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를 한 손에 움켜쥐고 적토마에 올라 적장(敵將)의 목을 베어 조조에게 바쳤다. 이후 그는 군공을 세워 은혜도 갚았고 유비가 있는 곳을 알았으니 ‘이제 떠나겠다’며 조조에게 하직 편지를 썼다. 적토마를 빼곤 조조가 보낸 선물을 빠짐없이 정돈해 남겨두고 탈출한다.
유비 진영으로 복귀한 관우는 ‘적벽대전’ 이후, 즉 40대 후반부터 지금 후베이(湖北)성 징저우(荊州) 일대에 머물며 지켰다. 징저우는 당시 전략적 요충지로 한 도시나 성곽이 아니고 한수이(漢水) 중류의 남쪽부터 창장(長江) 중류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의 이름이었다. 위·촉·오 3세력이 겹치는 최전방 방어라는 막중한 임무가 그에게 부여된 셈이었다.
이곳 징저우에 위치한 마이청(麥城) 서북의 깊은 산 속에서 관우는 5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여름에 무리하게 조조 진영을 공격했다가, 손권과 조조가 펼친 전광석화와 같은 협공에 직면해 가을엔 병력 대부분을 잃고 고립무원의 신세가 됐다. 그 해 추운 어느 날, 겨우 분대 규모의 기병(騎兵)과 함께 도피하던 중 겹겹의 포위망을 끝내 뚫지 못했다.
훗날 관우는 ‘신의(信義)의 아이콘’으로 다시 태어났다. 인공지능(AI) 시대가 도래한 지금도 일부 중화권에서 여전히 재신(財神)으로까지 숭배되고 있다. 상공인과 자영업자의 매장을 여전히 청룡언월도를 쥔 그 위풍당당한 자세로 지키고 있다. 그는 살아생전에 신의를 중시했다.
평화롭고 상호 존중하는 성숙한 사회에서는 개인 모두가 소중하다. 누구나 자신의 영웅이 될 수 있다. 한편, 불안정한 사회의 불안한 영혼들은 자신 밖에서 영웅을 찾는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거나 ‘난세를 헤쳐나갈 영웅을 기다린다’는 말들이 그래서 생겨났다. 가끔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혹시 내가 영웅을 기다리는지, 더 나아가 우리 사회가 여전히 영웅을 기다리는지에 대해 말이다.
홍장호 ㈜황씨홍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