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의 길에 운명을 걸다
만주·일본·한국서 총 10년간 장교교육
민족 차별·열악한 환경에도 우수 성적
日 사관학교 졸업 후 만주 소대장 역임
광복 후 한국군서 다시 육군 소위 임관
‘오족협화’ 얽힌 만주서 국제 시각 키워
3개국 군사 시스템 경험 ‘준비된 리더십’
박정희는 만주, 일본,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세 번의 사관학교 과정을 거치며 운명처럼 군인의 길을 걷게 된다. 어린 시절, 군인은 박정희에게 가장 강력한 힘의 상징이자 꿈이었다. 그러나 그 여정은 험난했으며,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 길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하며,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1939년 10월, 박정희는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 시험에 응시했다. 다음 해 1월 합격자 발표가 있었고, 그는 1940년 4월에 만주계 합격자 중 15등의 성적으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했다. 당시 2기생은 총 48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일본인 240명, 한족과 몽골족, 조선인 등 만주계 240명이 포함되었다. 조선인은 단 11명뿐이었고, 박정희도 그중 한 명이었다.
문경을 떠나 만주로 향하던 날, 문경의 유지들과 학부모, 학생들이 버스 정류장에 모여 그를 전송하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는 떠나기 전 제자들에게 “우리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말을 남겼다.
만주로 떠나기 전, 박정희는 고향 구미를 들렀다. 1940년 3월 하순, 구미역에서 그의 어머니는 옷자락을 붙들고 “늙은 어머니를 두고 왜 그 먼 곳에 가려느냐?”며 눈물로 그를 만류했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를 뒤로한 채 기차에 올라탔다.
“긴 칼을 차고 말을 달리며 천하를 호령하는 대장이 되고 싶다”고 말했던 박정희에게 당시의 만주는 ‘동양의 서부’로 불리는 미개척의 땅이자, 꿈을 펼칠 기회의 장이었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파산한 조선인들이 어쩔 수 없이 이주하던 곳이었던 만주는, 1930년대에 이르러 출세와 성공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몰려드는 땅으로 변모했다. 박정희 역시 교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군인의 길을 걷기 위해 만주로 향한 젊은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
‘동양의 서부’로 불리던 만주는 다양한 인간 군상과 욕망이 뒤엉킨 혼란의 땅이었다. 군인, 관료, 만주철도회사 조사부, 관동군, 팔로군, 장개석군, 마적, 김일성계 빨치산, 첩자, 아편 밀매자, 사기꾼 등이 몰려들어 살았다. ‘오족협화’라는 구호 아래 일본인, 조선인, 중국인, 만주인, 몽골인 등 다섯 민족이 얽혀 살아가는 용광로 같은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청춘을 보낸 박정희와 김일성은 20여 년 뒤 남과 북의 최고 통치자로서 맞서게 된다. 그들이 만주에서 보낸 시절의 경험은 남북한의 정치, 사회, 문화에 각기 다른 방향으로 깊은 영향을 끼쳤다.
박정희는 광활한 만주의 대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으며, 공업력을 기반으로 한 일제의 국력과 야망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산으로 둘러싸인 문경에서 교사 생활을 하며 답답함을 느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나팔을 불어보고, 제자들과 병정놀이를 하며, 운동에 전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넓고 탁 트인 광야를 발견한 것이다. 노을에 물든 붉은 수수밭이 끝없이 펼쳐지고, 폭이 100m나 되는 대로를 중심으로 대도시가 건설되며, 만주철도와 거대한 산업시설이 동맥과 고동처럼 이어지는 꿈틀대는 신천지를 보았다.
박정희가 약 4년간 머물며 호흡했던 이 만주는 그의 머릿속에 거대한 그림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몸집은 작았지만, 박정희는 우리 역사에서 보기 드문 스케일 감각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가 건설한 포항제철, 현대조선, 고속도로, 신도시, 중화학공업단지, 그린벨트는 좁은 한반도를 넘어, 마치 만주와 같은 대륙에 어울릴 법한 규모였다. 이는 우리의 역사적 전통과 국력에 비추어 보면 예외적이고, 어쩌면 과분하다고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박정희가 문경이나 한반도 안에서만 살았다면, 이와 같은 대담한 구상을 이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보지 못한 것을 건설하기란 매우 어려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신이 본 것보다 더 거대한 것을 상상하고 이를 실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일제가 내세운 ‘오족협화’는 허울 좋은 말장난에 불과했지만, 다섯 민족이 뒤엉켜 살던 만주는 박정희를 국제적인 시각으로 성장하게 만들었다.
또한 만주에서 맺은 인연은 그의 생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만주군관학교 시절 쌓은 인맥인 육군 참모총장 정일권, 1군 사령관 백선엽, 2군 사령관 강문봉 등은 훗날 여수·순천 사건 당시 박정희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살아남은 박정희는 5.16을 통해 집권했으며 이후 만주군관학교 출신 선후배들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박정희가 입학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생 조선인은 이한림, 이재기, 이섭준, 김재풍, 김묵 등 총 11명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17~19세의 나이로 입학했으나, 박정희는 5년제 사범학교를 마치고 3년간 교직 경력을 쌓은 후 23세의 나이로 입학했다. 그는 나이와 성숙함에서 동기들보다 앞서 있었으며, 이러한 배경은 그의 성장과 리더십 발휘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4년제인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달리, 만주국 육군군관학교는 2년제 예과 과정으로, 윤리, 법학, 철학, 역사, 중국어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오전에는 학과 수업이 진행되었고, 오후에는 군사훈련이 이루어졌다. 하루를 마무리할 때는 취침 직전에 ‘오성(五省)’을 암송하며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① 지성에 위배된 점은 없는가?
② 언행에 부끄러운 점은 없는가?
③ 기력(氣力)이 부족한 점은 없었는가?
④ 노력에 아쉬운 점은 없었는가?
⑤ 부정(不精)에 손을 댄 점은 없었는가?
만주군관학교 생활은 처참할 정도로 혹독했다. 특히, 박정희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민족적 차별이었다. 공식적인 식사에서도 일본인 생도들에게는 쌀밥이 제공된 반면, 중국인과 조선인 생도들에게는 수수밥이 주어졌다. 게다가 조선인 생도들은 중국인 생도들보다 수적으로 열세였기에 차별은 더욱 심했다.
또한 박정희를 고통스럽게 했던 또 다른 요인은 무자비한 구타였다. 1기생들은 2기생들에게 기강을 세운다며 구타를 일삼았고, 조선인 1기생들은 조선인 2기생들에게 일본인과 중국인에게 뒤지지 말라며 구타를 가했다. 이러한 1기생들에는 박임항, 최창륜, 이기건, 방원철 등이 있었다.
박정희에 대해 방원철은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박정희를 주먹으로 때린 적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휘청거렸지만, 박정희는 딱 버티고 서서 맞았다. 돌처럼 단단했다. 맞아서 몸이 밀려도 금세 제자리로 돌아와 다음 주먹을 기다리는 것을 보고, 정말 지독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정희의 동기생 이재기는 이렇게 회고했다.
“동기생으로 친하게 지냈다. 나이가 너댓 살 어린 1기생들로부터 구타 등의 수모를 받으면서도, 박정희가 과묵한 인내심으로 이를 견디는 것을 보고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한국인 중에 홍사익이라는 중장이 있었다. 그는 일본 육사 26기를 졸업했으며, 2차 대전 후 전범자로 처형되었다. 홍사익 중장이 한 번 만주군관학교를 찾아와 조선인들만 모아놓고 ‘민족적 차별 대우의 비통함을 극복하여 조선 민족의 우수함을 과시해야 한다’고 훈화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평소 과묵하기만 했던 박정희가 감동적인 열변으로 답사를 해 모두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
1기생 중에는 이기건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인민군 소좌로 복무하다가 6.25 전쟁 때 국군으로 전향해 사단장을 거쳐 준장으로 예편했다. 이기건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만주에서 그를 처음 보았을 때 왜 여기 왔느냐고 물으니, ‘왜놈 보기 싫어 왔다’고 말하더라. 나는 그때 처음으로 ‘왜놈’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북에서는 일본놈이라 말했기 때문이다.”
정일권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그때 만주군 상위(대위)로 복무하고 있었다. 박정희 생도는 일요일이면 내 관사에 들러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우리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을 나누며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는 담배와 술을 매우 좋아했는데, 나는 배급표를 정종으로 바꿔 대작하곤 했다. 그는 ‘일본놈들 머지않아 망할 것이다. 우리는 곧 독립할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박정희는 하늘을 향해 주먹질을 하며 독립군의 노래를 불렀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예과 시절, 검도, 유도, 승마, 교련은 물론 모든 과목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42년 3월 23일, 그는 만주군관학교 2년 예과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하며 금시계를 상으로 받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에 3학년으로 편입할 특전을 받았다. 또한, 졸업생을 대표해 재학생 송사에 대한 답사를 맡았다. 그의 이 모습은 뉴스영화로 촬영되어 많은 조선인 젊은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구미보통학교를 1등으로 졸업했지만, 대구사범학교에서 꼴지였던 박정희는 다시 수석으로 화려하게 복귀한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를 다니던 당시의 만주는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이 시기를 호흡했던 사람들 중에는 과감한 행동파들이 많았다. 만주군 인맥의 공통점은 강한 결속력, 뛰어난 행동력, 그리고 뚜렷한 정치적 성향이었다.
1942년 10월, 박정희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에 3학년으로 편입했다. 일본 육사에서의 박정희에 대한 동기들의 기억은 여전히 그의 뛰어난 실력과 리더십을 증명하고 있다.
일본 육사에 함께 들어간 만주군관학교 2기 만주계 생도 오학문은 박정희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동기였지만, 형뻘이었다. 일본 육사에 유학 중일 때, 중국 생도들과 일본 생도들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그가 중재에 나서곤 했다. 그는 워낙 말이 없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우리 중국 생도들이 이야기할 때 그의 표정이나 눈빛을 보면, 우리 편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학문은 일본 육사를 졸업한 후 만주로 돌아갔다가 장개석 군대로 편입했다. 이후 중공 정권이 설립되자, 그는 주은래의 참모로 활동했다. 훗날 그는 중일수교와 한중수교 협상에서 막후의 중요한 역할을 맡아 활약했다.
박정희와 단짝인 동기생 이한림은 ‘또렷한 특색을 지닌 박정희’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조그마한 체구였지만, 어깨를 딱 벌리고 당당하게 걷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가끔 둘이 만나면 조국의 비통한 현실을 개탄하며 함께 울기도 하고, 결심을 다지기도 했다. 특히 나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그의 불굴의 정신이었다.”
유학 동기생 이섭준은 이렇게 증언했다.
“일본 육사의 교육은 만주군관학교보다도 더 정신적으로 쥐어짜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이곳에서도 모범생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당시 거의 일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나의 눈에 비친 박정희는 확실히 달랐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배울 것은 군사학뿐이다. 우리는 독립을 해야 한다”고 박정희는 말하기도 했다. 내가 “독립이 무엇인가?”라고 묻자, 그는 “독립이란 혼자 사는 것이다.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다”라고 간단명료하게 답했다.
박정희는 1944년 4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57기를 3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만주군관학교 예과 2년과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2년을 거친 박정희는 유연성을 중시하는 만주군과 원칙주의를 강조하는 일본군의 인맥 성격을 모두 공유하고 있었다. 또한, 박정희는 군대를 독립투쟁이나 국가 보위의 수단뿐만 아니라, 국가 개조를 위한 방법으로 인식하는 사고를 키워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보낸 4년 동안, 이미 그때부터 혁명을 꿈꾸기 시작했을 것이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박정희는 1944년 7월 1일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광복이 될 때까지 그는 만주군 보병 8단에서 몇 개월간 소대장직을 수행한 뒤, 단장 부관으로 근무했다. 만주군 장교로 임관된 박정희는 만리장성 북쪽 열하성에 배치되어 주로 모택동의 팔로군(정식 명칭: ‘국민혁명군 제8로군’, 중국 공산당 휘하 독립적 성향을 가진 부대)을 공격하는 작전에 참가했다.
일부 진보·좌파 세력은 박정희가 만주군으로 독립군을 토벌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다. 박정희가 만주국에서 초급장교로 근무하던 시기에는 만주 지역에 이미 독립군이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의 압박과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으로 인해 독립군은 중국 내륙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이미 만주에 존재하지 않는 독립군을 초급장교였던 박정희가 어떻게 토벌할 수 있었겠는가? 박정희는 만주의 조선인 독립군을 토벌하는 부대에 근무한 적이 없으며, 독립지사들을 수사하는 부서에서 근무한 적도 없다.
1946년 5월 6일, 그는 중국 청진항에서 미군 상륙용 함정을 타고 귀국해, 5월 8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민간인 신분으로 귀국한 뒤 잠시 고향에 머물며 넉 달간 휴식을 취했다. 이후, 1946년 9월 24일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했다. 이는 만주군관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이어 세 번째 사관학교였으며, 만주군, 일본군에 이어 세 번째로 입은 군복이었다.
그는 29세의 나이로 생도가 되어 항상 꼿꼿한 태도로 훈련에 임했다. 태릉의 경비사관학교는 시설이 열악해 창틀은 있었으나 유리가 없었고, 모포에는 이가 버글버글했다. 흉년으로 인해 식량도 부족해 강냉이밥과 고구마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묵묵히 훈련을 견디며 스스로를 단련했다.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들은 교육 목표와 태도에서 크게 갈렸다. 박정희를 비롯한 일부 엘리트 그룹은 ‘우리나라의 군사적 독립’이라는 명확한 목표의식 아래 단결했지만, 나머지 생도들은 그러한 의식이 부족했다.
교육 과정에서 가장 많은 시간이 제식훈련에 투입되었다. 일본군 식의 ‘우향 앞으로 가’는 미군 식과 달랐다. 일본군 식의 교육을 받았던 장교들은 이러한 미국화된 교육에 불만을 품었다. 나름대로 엘리트 의식을 가졌던 일본군 출신 장교들은 미군들과 충돌이 잦았다. 반면, 대체로 만주군 출신 생도들은 혼란스러운 창군 과정에 잘 적응했다. 만주의 혼란스러운 상황에 익숙했던 만주군 출신들은 미군들과도 잘 어울렸다. 이는 만주군 출신들이 초창기 한국군에서 헤게모니를 잡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박정희는 3개월간의 단기 과정을 마치고 1946년 12월 14일,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했다. 교육 과정 중 동기 군번 69명이 탈락하고, 194명이 졸업했다. 군번은 성적순으로 부여되었으며, 박정희는 3등이었다. 겨울에 거행된 졸업식에서 졸업생들은 여름옷을 입어야 할 만큼 피복 보급이 열악했지만, 독립 국가의 기반이 될 국군을 만든다는 열정에 가슴이 뜨거웠다. 박정희는 광복 이후의 한국군에서 다시 육군 소위로 임관하며 군인 생활을 시작했다.
박정희는 사실상 준사관학교에 해당했던 사범학교 5년, 만주군관학교 2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2년, 조선경비사관학교 3개월까지 총 10년에 가까운 장교 교육을 받았다. 이러한 교육은 그의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자세와 철저한 군인 정신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는 대한민국, 중국, 일본의 군사 시스템과 문화를 고루 경험하며 성장했다. 박정희는 만주군 출신의 유연성, 일본군 출신의 원칙주의, 그리고 독립 국가가 된 대한민국의 열망과 애국심을 겸비한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박정희는 타고난 운명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적 통념에 따르지 않고 반항하는 기질, 즉 반골 기질로 끊임없이 도전했다. 박정희는 쉬운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결코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쉽고 편한 길을 ‘죽음의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가족들의 강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만주행을 선택했고, 일본행을 선택했다. 그는 처절할 만큼 혹독한 과정 속에서 내면에 잠들어 있던 잠재력을 일깨웠다.
군인의 길에 운명을 건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한 1946년은 그의 나이 30세였다. 이 시점은 ‘이립(而立)’이라 불리며, 학문의 기초가 확립되고 인생 철학이 정립되는 시기로 여겨진다.
사관생도 박정희는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며, 강한 군사적 지도자로 성장하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행동했다. 그는 독립과 국가 개조를 위한 수단으로 군사력을 인식하며, 준비된 지도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했다. 원칙주의, 실용주의, 민족적 자존감, 그리고 혁명적 사고는 그의 지도자적 성격과 정책 방향의 근간이 되었다.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질문은 박정희가 평생 자신에게 던진 화두였다. 그의 준비된 활약이 앞으로 대한민국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기대된다.
덧글) 9회에서 15회까지는 박정희 대통령의 출생부터 30세까지, 입지를 다져나간 과정을 담았다. 그의 30세까지의 고난과 도전의 여정은 단순한 개인의 성장기가 아니라, 역경 속에서도 기회를 창출하는 대한민국 역사의 상징을 보여준다.
글=박정희아카데미 부속 박정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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