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통화기금(IMF) 긴급 구제금융을 받던 1997년 말, 우리 국민 대다수는 느닷없이 ‘대역죄인’으로 몰렸다. 당시 문민정부와 언론은 외환위기의 책임을 국민의 무분별한 해외여행과 흥청망청한 과소비 탓으로 돌렸다. 엉성한 외환 관리 정책과 재벌가의 분식회계, 탐욕적 경영은 슬그머니 뒤로 밀려났다.
졸지에 국난의 원흉이 된 서민들은 스스로 참회의 고행길에 올랐다. 옆집 김 씨 아저씨는 구멍 난 양말을 기워 신으며 ‘아나바다 운동’을 실천했고, 뒷마을 박 씨 할머니는 애지중지하던 금가락지를 기꺼이 내놓았다. 누군가 “네 탓이오”라고 하면 “내 탓입니다”라고 받아들이던 순박한 시절이었기에 가능했던 풍경이다.
이 지독한 ‘국민 탓’이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재연되고 있다. 원·달러 1500원 돌파를 눈앞에 둔 초유의 고환율 국면에서 정부와 한국은행은 원인을 ‘서학개미’에서 찾았다. “쿨하다는 이유로 해외투자를 하더라”는 중앙은행장의 말에는 젊은 세대의 경제적 선택을 철없음으로 치부하는 인식이 깔려 있다.
경제부총리는 더 나아가 해외투자자에 대한 세제 불이익 가능성까지 시사했다. 환율 방어가 여의치 않으면 결국 국민의 노후 자금인 국민연금마저 끌어다 쓸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역대급 돈 풀기로 부동산 가격을 치솟게 해 청년층의 ‘주거 사다리’를 걷어찬 주체는 또 누구였나. 자산 증식의 꿈을 빼앗긴 이들의 절박함이 만들어낸 ‘빚투’를 손가락질할 자격은 누구에게 있을까. 이번에도 정책 실패를 자성하는 정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달라진 건 더 이상 ‘남 탓 프레임’에 속아줄 순진무구한 국민이 없다는 점이다. 자신을 희생할 여유도 없을뿐더러 설령 그러더라도 ‘언 발에 오줌 누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누구나 안다. 환율은 계엄 사태 당시 수준인 1470원 안팎에 갇혀 있고, 소시민의 삶은 여전히 팍팍하기만 하다. 정부·여당은 출범 때부터 ‘국가 정상화’를 외쳐왔지만 비상계엄이 해제된 지 1년이 넘도록 체감 고통은 갈수록 깊어지기만 한다. ‘국민주권정부’라는 이름이 역설적으로 느껴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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