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홈플러스 노동자 4인 연속 인터뷰 ① 우리는 회사를 사랑합니다. 노동자는 소모품이 아닙니다

2025-05-24

소비자가 마트에 갈 땐 그들을 한 번씩만 겪지만, 마트 노동자들은 온갖 군상을 매일 만난다. OTT 드라마 <약한 영웅>에서 주먹깨나 쓴다는 ‘고딩’들이 상대 어깨의 사소한 움직임만으로 날아오는 주먹의 방향을 알고 피할 수 있다고 하듯 이들은 소비자의 작은 움직임과 표정을 읽어낼 것이다. 같은 말을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을 할 이들이 각양각색의 소비자가 비슷한 수준으로 만족할 수 있게 얼마나 많은 감정을 소모할 것이며, 섬세한 배려와 바지런한 움직임을 해야 할 것인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그런 이들이 우직하게도 한 회사를 너무나 사랑했고, 그 회사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를 친구처럼 의지했고, 200명이 할 일을 150명이 나눠 해도 더럽고 아니꼬워서 때려치우겠다는 말을 절대 내뱉지 않는다. 일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로서 자기 어깨를 두드려주고 싶고, 노는 인간, 호모 루덴스로서 정당하고 정직한 권리를 누리고 싶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어른의 본을 보이고 싶고, 내 손으로 번 소금기 잔뜩 묻은 월급봉투로 아이들이 더 많이 배우고 가족이 더 건강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회사가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했다. 20년 동안 일한 직장에서 노동조합 덕분에 겨우 정직원이 됐고, 최저시급밖에 못 받는 이 사람들이, 연봉 2,500만 원 정도밖에 안 되면서도 여전히 회사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이 사람들이 회사를 지키기 위해 아무리 외쳐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 다 토해내시라고 했다. 멋진 말 아니어도 좋고 대단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머쓱해할 때까지 두 시간 동안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연속해서 게시한다.

이름을 약칭해서 쓰려고 보니 참 재미있는 글자들의 조합이다. 김영옥의 ‘옥’, 김말숙의 ‘숙’, 도경민의 ‘도’, 손경선의 ‘손’. 오순도순. 이들의 모습과 마음에 참 잘 어울리는 말이다.

홈플러스는 현장 노동자가 거의 여성, 관리직은 남성

Q. 소개 부탁한다.

김말숙(이하 “숙”): 울산 동구점에서 근무하는 김말숙이다.

김영옥(이하 “옥”): 홈플러스 동구점에서 일하고 있는 마트 노동자 김영옥이다.

도경민(이하 “도”): 홈플러스 중구에서 일하고 있는 도경민이다.

손경선(이하 “손”): 홈플러스 울산 남구점에서 근무하고 있는 손경선이다.

Q. 홈플러스 노동자들은 모두 여성인가? 노동조합에 남성은 없나?

도: 남성도 있다.

숙: 거의 안 했다. (남성 노동자 수가) 모자라서.

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초창기에는 우리가 비정규직이었다. 처음에 (회사가) 정규직은 비정규직이 만든 노조에 가입할 수가 없다고 얘기했다. 지금은 우리가 다 정규직이 되어 있는데, 보통 남성들은 관리자가 많다. 그런데 관리자들은 노동조합을 잘 안 하려고 한다. 회사 눈치도 보이고, 본인들 말로는 가입하면 전배(전환 배치)를 보낸다든지 불이익을 많이 준다고 하더라고. 지금 회사 살리려면 너희들이 가입해야 하지 않겠나, 다른 회사 같으면 남성들이 회사를 지키려고 노력하는데 여기는 지금 너희들 엄마뻘 되는 여성들이 싸우고 있는데 왜 너희들은 안 하냐, 하니까 말을 안 하더라.

Q. 엄마뻘이라면 남성들은 모두 어린가?

도: 30대 초반 40대. 점장들은 나이가 좀 많다.

Q. 현장에서 몸을 많이 써야 할 텐데 남녀 구성이 왜 그렇게 된 건가?

옥: 예전에는 홈플러스가 영국 테스코 기업 (소유)였다. 한국에 상륙할 때 삼성물산에서 시작됐고. 대구점이 1호다. 대구점이 출발할 때 남성 관리자들이 여성의 싼 노동력으로, 저임금 비정규직을 채용해서 그렇게 운영했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처음에 홈플러스가 들어올 때 까르푸나 월마트 이런 데가 많았는데, 월마트나 까르푸가 (운영이) 잘 안되다 보니 영국 테스코 기업이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에 어떻게 하면 운영이 잘 되는가를 확인했고, 삼성(의 고용 시스템)을 본 것 같다.

삼성물산이 들어왔고, 그다음에 홈플러스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 거다). 지금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남성은 관리하는 상황, 여성 노동자들은 한 부서에 대다수를 차지하면서 많은 일을 시키고. 여기 있는 사람들이 보통 10년, 20년 이상 넘는데, 저임금에 고강도로 노동하다 보니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 아픈 데가 없고, 남성 노동자들은 스트레스가 많다. 관리를 하려다 보니까.

처음부터 그런 체계가 출발점이다 보니 지금까지 그렇게 진행이 돼 있고, 노동조합이 생기기 전에는 그게 당연시되어 있었고. 그러다가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걸 계속 되뇌다가 노동조합을 만들게 되었고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

울산 홈플러스 노동조합 가입률은 너무 낮다

Q. 울산에 홈플러스가 몇 군데 있나? 근무자 수와 노동조합 가입자 수도 알려달라.

옥: 홈플러스는 울산에 4개 있다. 남구, 중구, 동구, 북구 이렇게. 나는 동구에서 근무하는데, 우리 전체 직원은 직영 인원만 112명이다. 그런데 조합원은 60명이다. 전부 다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고, 여성 몇몇 빼고, 남성 노동자는 단 한 명도 노동조합에 가입을 안 했다.

우리는 112명이지만 현장에 약국, 화장품, 물고기 파는 데, 서점, 미용실까지 모두 다 입점 업체가 들어가 있다. 현장에 와 보면 동원입니다, 하림입니다, 서울우유입니다, 풀무원입니다, 이렇게 해서 협력업체 직원들 한 그룹도 있다. 청소 노동자, 주차 카트 관리하는 사람들, 이렇게 분류가 다 나뉘어 있다. 예전에 주차, 안전을 관리하는 데가 협력업체 직원들이었다. 그 계약이 만료된 뒤 지금은 직영 직원들이 전배를 가 있는 상태이다.

쉽게 나눠서 홈플러스는 직영 직원과 협력업체, 입점주, 외주업체, 이렇게 돼 있다. 그 인원이 좀 많다. 울산에서 중구가 제일 크다. 우리가 200명이 넘었는데 지금 다 나가고 지금 153명 정도. 노동조합 가입한 사람은 52명 정도 된다.

중구가 가입률이 조금 저조한 편이다. 중구는 지역 특성상 보수적인 데다 보니까 노조에 대한 인식도 되게 안 좋다. 옛날에 처음 시작할 때는 100명 정도로 시작했다가 노조 탄압을 받으면서 다 탈퇴했다가 30명이 다시 노조에 가입했고, 지금 50명까지 늘어났다. 회사가 위험하다고 하니까 (회사를) 지키려고 지금 (노조에) 들어오는 중이다.

10년, 20년이 넘어도 여전히 월 급여는 180만 원, 부끄럽다

Q. 관리자와 비교할 때 현장 노동자들의 급여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손: 최저임금.

옥: 크게 다르다. 나는 홈플러스 입사한 지 17년 정도 됐는데, 그때 점장 임금이 7, 8천에서 1억 가까이 됐었다.

도: 점장들도 다 다르다. 점별 규모마다 점장들이 연봉을 계약하다 보니까 7, 8천 받는 사람도 있고 1억 넘어가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천차만별이다. 관리직과 우리가 차이가 나는 편이다.

옥: 우리는 딱 최저임금. 최저임금에 많으면 100원, 200원 (더 받는다). 그것도 노동조합이 있어서 그렇게 가능한 거다. 별도로 나오는 게 없다. 상여금도 있는 걸 지킨 것이고. 최저임금 오른 만큼 상여금도 오르고, 최저임금만큼 상여금이 나오니까 (1년에) 14번의 월급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가장 정확하다.

Q. 17년이나 됐는데 최저임금을 받고 있다고?

옥: 그렇다. 사실 동창들을 만나면 홈플러스를 다니면서도 임금이 얼마라는 얘기는 안 한다. 말하기 부끄럽다.

숙: 부끄럽다. 17년인데 180이 안 되니까 전부 다 놀란다.

손: 나도 21년 차인데 이제 겨우 200이 조금 넘었다.

중공업 수준의 고강도 노동, 온몸이 아프지만 산재 적용 못 받는다. 노동자의 권리를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았다

Q. 상여금이 200%라고 해봐야….

도: 정말 고강도 노동이다. 왜냐하면 200명이 일하던 걸 지금 150명 정도가 나눠서 한다. 200명 정도 일할 땐 남성이 많았다. 그땐 음료 (상자) 같은 건 남성이 (운반)했는데, 지금은 남성들이 거의 다 나가고 자리 지키는 사람들은 50대 중반, 그런 사람만 남아 있다.

지금 회사가 기업 회생 들어가니까 갑자기 젊은 아르바이트를 쓴다. 그전까지는 안 썼다. 거의 50대 중반의 여성들이 이 업무를 하다 보니까 근골격계 (질환을) 안 앓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나도 수술을 두 번 했다.

Q. 산재보험은?

도: 산재 적용 못 받았다.

옥: 규명받기가 좀 힘들다.

도: 힘들다, 근골격계는.

옥: 노동조합이 생기고, 우리가 워낙 무거운 걸 많이 들다 보니까 문제가 생겨서 상자에 구멍 뚫기를 했다. 당시 부산대 양산캠퍼스에 가서 온몸에 (마커 센서)를 붙여서 하루에 8시간 상자 드는 걸 테스트했더니, 기본 정도의 일을 하는 게 중공업만큼의 고강도 노동이라고 얘기했다. 몇 년 안에 안 아픈 곳이 없을 것이라는 게 평균값으로 나오더라. 그러면서 상자에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홈플러스 처음 입사했을 때는 7.5 계약이었다. (30분 단위로 계약하는) 쩜오계약제라는 게 있었다. 삼성이 0.5 계약제로 (고용계약을 했다). 지금은 최저임금으로 월급이 180만 원으로 딱 (계산이) 정해지는데, 옛날에는 3.75 곱하기 얼마, 이렇게. 이 계산법을 인사과에서도 몰랐다.

그런 식으로 노동력과 임금이 많이 착취됐는데, 그래도 여기가 영국 테스코 기업이다 보니까 병가 제도나 산재에 준하는 기준은 잘 돼 있었다. 그런 게 있음에도 우리 직원들에게는 안 알려줬다. 정규직들만 알고 있고 우리 같은 비정규직은 아프면 사직서 쓰고 집에 가는 게 다반사였다. 노동조합이 생기면서 (노동자에게 유리한 제도를) 얘기하니 (우리는) 비정규직 아줌마에서 똑같은 노동자의 입장이 된 거다. 사원의 입장. 우리는 이 노동조합이 생기면서 당연한 권리를 찾게 됐다.

흔히들 마트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듣는 게 ‘도시형 공장에서 일하는 그림자들’이다. 하루 종일 종종걸음으로 평균 1만에서 2만 보를 걷는다. 최소가 1만 보다. 그 공간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걷는 건 진짜 몸을 상하게 하고, 그만큼 힘들게 일하는데도 그 노동력에 대한 값어치를 제대로 못 받고 있다. 아무리 얘기를 해도 감히 노동자들이 최저임금 투쟁의 목소리를 내느냐, 너희들 때문에 나라 말아먹는다는 소리만 많이 듣는다.

우리는 최저임금 투쟁할 때 가장 앞장서서 한다. 왜냐하면 우리 임금이고 퇴직금이고 상여금이다 보니까. 진짜, 삿대질은 기본이고 욕 많이 들어 먹었다. 진짜 우리는 살기 위해 하는 건데,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한 데서 일하면서 무슨 호강에 겨운 그런 얘기를 하냐고. 그런 얘기들은 멋모르고 하는 얘기인데, 실제 일해 보면 웬만한 공장보다 더 못하다는 얘기를 (우리끼리) 많이 한다. 지금은 어느 정도 다녔으니까 인이 박였고, 또 동료들도 좋고 노동조합도 있으니까 견디는 거지. 다른 데보다 목소리도 낼 수 있고 그러니까.

매장 안에서 대화만 해도 무슨 얘기 했냐며 캐묻는다

Q. 마트 내 외주 용역은 어떤 일을 맡고 있나?

옥: 그들은 청소, 미화, 카트 정리, 파지, 쓰레기 같은 걸 정리하는데, 대다수가 나이가 많다. 정년 퇴임한 연로한 어르신들이 많이 한다.

식당도 있다. 예전에 우리가 보고 깜짝 놀란 게, 24시간 영업했을 때, 그들은 새벽 2, 3시에 와서 매장 청소를 한다. 그런데 너무 열악하게 임금을 받는 거였다. 근데 한 번씩 질문을 한다. 우리가 노조 조끼를 입고 다니니까 질문하는데, 그들은 정말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거지. 단지 노인이라는 이유로, 힘이 없다는 이유로, 다른 일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우리와 대화만 해도 (관리자가) 무슨 얘기 했냐고 (캐묻는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다.

도: 인사과에서 눈치를 준다.

옥: 지금은 그 (외주 용역) 인원도 많이 줄었고, 10시까지밖에 근무를 안 하니. 그들이 있어서 우리가 청소는 안 해도 된다.

Q. 노조에 가입한 사람들로 한정했을 때 평균 근속 연수는 얼마나 되나?

숙: 10년 이상은 다 된다.

옥: 거의.

도: 10년 이상.

손: 한 10년 이상 20년.

우리 엄마 노동자들은 홈플러스 직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Q. 장기 근무를 하게 된 원동력이 있나?

숙: 신랑이 자유업이다. 조그마한 장사도 했다가 사업도 했다가 이러는데, 뭐랄까 (고정적으로) 정확하게 들어오는 돈이 없다. 그리고 남자아이 둘을 키우다 보니 엄마로서, 여성 노동자지만 여기서 정년퇴직해서 자식들한테 일이라는 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여줄 수 있는 모범의 표본이 되고 싶었다. 중간에 기분 나빠서, 위에서 뭐라 한다고, 핍박받아서 일 그만두고 그런 게 아니라 나는 꿋꿋이 여기를 지켰다는 모범이 되고 싶었다.

중간에 희망퇴직자를 받았다. 조건이 좋았다. 아무래도 1억 정도가 들어오니까 그만둘 수도 있었다. 근데 계속 일했던 첫 번째 원동력은 자식들한테 표본이 되고 싶었던 거다. 내 어머니는 이렇게 성실하게 살았다. 내 부모는 나를 위해 이렇게 했다. 나중에 세월이 흘렀을 때 직장을 다니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때 아, 내 어머니도 참았는데 나도 한번 참아보자, 그런 것.

주위에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마음이 잘 맞았고, 또 그들이 선한 영향을 줬기 때문에 이렇게 버틴 거 같다. 앞으로 내가 그 사람들한테 표본이 되어 주고 싶고, 난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 후배들에게 일은 이렇게 해야 하고 이렇게 마음을 나눠야 한다, 이런 걸 보여주고 싶어서 정년퇴직까지 기다리고 있다.

손: 나는 37세에 들어와서 지금 21년 차이다. 그땐 자녀들이 학생이었다. 배우자가 수입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좀 벌어서 자녀들 학원비라든지 보탬이 되고자 입사했고, 내 또래의 엄마들은 거의 다 생각이 비슷할 거다. 우리 또래의 부모들은 어디 한 번 입사하면 자꾸 옮기고 이런 게 아니라 꾸준히 다녔다. 물론 가정에 보탬이 되려고 입사했지만, 기질적인 면도 있고 꾸준히 한 회사에 오래 있어야 한다는 그런 마음도 있고, 다니다 보면 애사심도 생기고. 1년, 2년, 3년, 하다 보니까 이제 다 20년, 15년, 이렇게 되는 거다. 우리는 회사를 위한 애사심이 크다. 전부 다 엄청 많지.

옥: 대다수가 그렇다. 조금 손해 보더라도 내가 이 회사에 있음으로써 회사가 발전되고 이런 게 우리 시대 때 배웠던 거고. 이렇게 하면 회사가 나를 알아주고 챙겨주고 그렇게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젊었을 때, 결혼 전에 다니던 회사는 자주 옮겨 다녀도 되지만 30대 중반에 입사했을 때 여기는 사람도 많고 활기차고 조금 다르지 않겠나라는 기대감도 있었고. (물론) 실망도 조금 있었지만. 사실은 사람 관계지. 회사도 정말 사랑하지만, 지금은 동료들과 끈끈함이 더 많지.

사장이 온다고 할 때 새벽 3시까지 근무하고서 다음 날 7시까지 출근하라고 해도, 신랑 밥은 안 해놔도 사장 출근 시간에 맞춰서 나란히 서서 손톱 검사까지 받으며 일구었던 그 회사였다. 귀걸이도 못 하고 단정하게 쪽머리에 머리 망까지 딱 하고 정말 대단한 회사에 다니는구나, 하는 것을 계속 인지하게 되니까. 동료도 그렇게 생각하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우리 대단한 사람이다, 우리 정말 훌륭한 사람이다. 우리 동네에서 이 큰 마트의 직원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었는데, 점점 갈수록 우리는 최저임금에서 못 벗어나는데 점장들은 1억에 준하는 임금에 법인카드에, 실적 좋으면 진급해서 올라가지만 우리는 늘 그 자리인 거다. 그럼에도 현장에서 10년, 20년, 정년 퇴임할 때까지 이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는 게 소망이다.

근데 회사는 우리를 그렇게 생각할까? 아니면 그냥 100만 원짜리 200만 원짜리 최저임금의 비용 처리로 생각할까? 우리는 분노하는데 왜 그들은 분노하지 않는가? 내가 사랑했지만, 꼭 그 사랑을 바라지 않았지만, 너무 섭섭하기도 하고 분노스럽기도 하고, 그런 게 더 많은 것 같다, 지금 직원들은.

(630호에 계속)

이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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