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변할 미 상원의원 줄었다…‘칩스법 찬성’ 공화당 5인 힘빠져

2025-01-05

미국 의회가 3일 개원한 가운데 한국 기업들이 투자를 결정한 미국의 지역구 상원의원 중 반도체과학법(칩스법)에 찬성했던 인사들이 트럼프 정부 출범을 앞두고 권력에서 멀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중앙일보가 5일 현지 컨설턴트의 자문을 받아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칩스법 표결 결과를 분석한 결과다.

반도체 등 공급망과 관련된 분야의 미국 내 투자에 대한 보조금을 지급하는 칩스법은 미국에서 생산된 전기차에 보조금을 주는 IRA와 함께 한국의 대미(對美) 투자를 가능하게 한 법이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부정적 입장을 밝혀왔다.

트럼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업의 투자를 받은 곳의 공화당 상원의원 가운데 약 절반이 칩스법에 찬성했다. 당시 공화당이 내세웠던 ‘반대 당론’에 반대한 이탈표였다.

“한국기업 진출한 곳 의원들 우군 삼아, 트럼프 키맨 공략을”

그런데 이들 중 상당수가 현재 ‘트럼프의 눈 밖에 났다’는 평가를 받게 됐다. 동시에 한국 기업이 투자한 지역엔 트럼프를 추종하는 강경파가 대거 입성한 것으로 분석됐다. 트럼프 정부 출범을 앞두고 한국 기업들의 부담이 가중될 거란 우려가 나온다.

중앙일보가 입수한 산업통상자원부의 ‘주요 대미 투자 현황’에 따르면 한국의 주요 대미 투자기업 16개는 미국 20개 주(州) 24곳에 생산시설을 두고 있거나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 이들은 2022년 IRA와 칩스법이 통과된 뒤 544억 달러(약 80조원)의 투자를 결정했다. 1985년 이후 총투자액 977억 달러(약 143조원)의 55.7%가 지난 2년 사이에 결정됐다.

한국 기업이 투자한 지역구의 상원의원 40명 중 15명이 공화당 소속이다. 이들 중 13명이 칩스법 표결에 참여했고, 6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비율로는 46.1%에 달한다. 공화당 전체에서 나온 찬성 비율 32%를 훌쩍 뛰어넘는 수치다.

미국 정치를 분석해온 장성관 컨설턴트는 “한국 기업을 유치한 곳의 상원의원들이 눈에 띄게 찬성 투표에 가담한 것은 지역구에서 일자리를 창출하는 등 한국 기업의 역할을 의식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그런데 이들 중 5명이 주류에서 밀려났거나, 예상과 달리 각료에 기용되지 못했다. 역대 최장수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를 지낸 미치 매코널(켄터키) 의원은 트럼프와 내내 맞선 끝에 지도부에서 물러났다. 민주당과 칩스법안을 공동 작성했던 존 코닌(텍사스) 의원은 당내 원내대표 경선에서 패했다. 토드 영(인디애나) 상원의원은 대선 과정에서 반 트럼프 행보를 보였고 빌 캐시디(루이지애나) 상원의원은 트럼프 탄핵 심판 당시 찬성파로 불린다.

LG전자·SK온·한국타이어 등 다수 기업이 위치한 테네시의 빌 해거티 상원의원의 경우 상무장관 후보로 거론됐지만, 트럼프는 그의 이름을 호명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여전히 트럼프의 핵심 인사로 분류된다.

한국에 우호적이던 민주당 의원 일부도 트럼프 측근들에게 패했다. LG에너지솔루션이 투자한 오하이오와 SK팜테코가 위치한 펜실베이니아에선 공화당 버니 모레노와 데이비드 매코믹이 각각 민주당 현직을 꺾었다. 두 사람은 트럼프의 강한 지지를 받는 사업가 출신이다.

스테판 슈미트 아이오와주립대 명예교수는 “트럼프의 정책을 강하게 추진할 강경파는 당장은 한국에 악재”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상원의원은 지역구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기 때문에 트럼프와 지역구의 이해관계를 놓고 맞설 수 있다”며 “한국은 이들을 통해 트럼프에게 영향을 끼치는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실제 상원뿐 아니라 한국 기업이 위치한 지역 하원에도 트럼프 ‘키맨’들이 다수 배치돼 있다. 마크 터너(오하이오) 하원의원은 정보를 다루는 정보위원장이다. 그는 한국 기업의 투자를 받은 곳의 공화당 하원의원 중 유일하게 칩스법에 찬성했다. 또 칩스법 유지를 주장해온 브렛 거스리(켄터키) 하원의원은 에너지·상무위원장이 됐고, 마크 그린(테네시) 의원은 트럼프의 핵심 의제인 이민 문제를 다루는 하원 국토교통위원장이다.

기업들은 자체적으로 공화당 의원 공략에 나섰다. 한 기업 관계자는 중앙일보에 “기업들이 의회가 있는 워싱턴에 대관 기능을 집중한 것은 생존 전략”이라며 “지역구 의원 중에서도 권한과 독립성이 강한 상원의원이 최우선 공략 대상”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9일 방미한 신학철 LG화학 부회장 역시 LG가 투자한 테네시의 마샤 블랙번, 빌 해거티 상원의원부터 만났다. 블랙번은 트럼프 1기의 인수위 부위원장을 지냈던 핵심으로, 칩스법 표결에선 반대표를 던졌다.

트럼프 1기 때 대미 경제정책을 주도했던 여한구 전 통상교섭본부장은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2017년 트럼프가 한·미 FTA를 파기하려고 했을 때 초당적 의원단이 공화당 의원들을 공략해 트럼프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게 했다”며 “미국 의원들을 통해 트럼프를 움직이는 ‘보텀업(bottom up)’ 방식의 의원 외교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여 전 본부장은 이어 “기업의 투자를 레버리지 삼아 국회의원들이 공화당 내 영향력이 큰 인사들을 초당적으로 공략하는 것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국회가 국익에 기여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자 시급한 의무”라고 강조했다.

장성관 컨설턴트도 “상대적으로 독립적이고 마가(MAGA) 성향이 소수인 상원을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대통령 탄핵 사태 후 장관급 정부 고위 인사 중 처음으로 6일 미국을 방문, 트럼프 정부 출범을 앞두고 공화당 주요 인사들을 만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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