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건강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2025-05-21

제5공화국 말기인 1987년 9월 한국 외교사상 전례를 찾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그해 9월8일 방한한 비르힐리오 바르코 바르가스 콜롬비아 대통령이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며 쓰러진 것이다. 긴급히 서울대병원으로 후송된 그를 진단한 의료진이 내놓은 판정은 복막염이었다. 결국 바르가스 대통령은 수술을 받고 며칠 동안 요양하며 건강을 되찾은 이후 9월17일에야 전두환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그로부터 하루 지난 9월18일 본국으로 돌아갔으니 무려 열흘이나 한국에 머문 셈이다.

1998년 11월23일 모스크바에서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과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그런데 두 사람이 만난 장소가 특이했다. 러시아 대통령 관저인 크레믈궁이 아니고 모스크바 중앙병원이었다. 이는 회담을 몇 시간 앞두고 옐친이 갑자기 폐렴 증세를 보이며 체온이 39도 가까이 올라 급히 입원했기 때문이다. 항생제 치료를 받은 옐친과 장쩌민의 대면은 고작 40분 만에 끝났다. 이듬해인 1999년 옐친은 건강 악화를 이유로 정계에서 은퇴했고, 블라디미르 푸틴 현 대통령이 그의 후임자가 되었다.

세계 어느 나라든 대통령의 건강은 국민의 최대 관심사 가운데 하나다. 우리나라의 경우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3년 대통령 주치의 제도를 도입했다. 천연두 예방을 위한 종두법을 국내에 처음 소개한 것으로 유명한 지석영(1855∼1935) 선생의 종손인 지창영 의학박사가 초대 대통령 주치의를 맡았다. 차관급 직책이라고는 하나 실은 무보수 명예직으로 소정의 활동비를 받을 뿐이다. 평소에는 2주일에 1번 정도 대통령과 만나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전부이지만, 대통령의 해외 순방 때에는 대통령실 공무원 신분으로 동행한다고 한다.

올해 1월20일 퇴임한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이 전립선암에 걸렸으며 암이 뼈까지 전이된 사실이 지난 18일 공개됐다. 사망 가능성이 매우 높은 고위험군에 속한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후임자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물론 언론 매체들도 “그 지경이 되도록 몰랐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며 현직 대통령 시절 자신의 건강 상태를 은폐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대통령 주치의라는 사람은 대체 무엇을 한 것이냐”는 질책도 거세다. 대통령의 건강은 개인 사생활을 넘어 국민 알 권리에 해당하는 중대 정보라는 점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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