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치클록의 시대, 규정된 시간 안에 공을 던지지 못하거나 타격 준비를 마치지 못하면 제재를 받는다. 야구 심판이 빠르고 원활한 경기 진행을 위해 투수나 타자를 재촉할 필요도 크게 줄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심판의 역할 자체가 덜 중요해진 것은 아니다. 피치클록은 심판들에게 새로운 운용의 기술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 17일 잠실에서 올해 첫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졌다. 4회말 LG 박해민이 타격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NC 김태경이 공을 던진 게 발단이 됐다. 피치클록 규정에 따르면 타자는 타이머에 8초가 표시되기 전까지만 타격 준비를 마치면 된다. 당시는 15초 정도가 남아 있었다. 박해민 입장에서는 아직 제한시간이 충분히 남아있는데 갑자기 공이 날아온 셈이다.
경기 후 김태경은 구단을 통해 “투구할 때 곁눈질로 타이머를 보면서 투구를 했는데 순간적으로 타자가 준비됐다고 생각하고 던졌다. 내 착각이었다”고 설명했다. 피치클록 타이머를 신경 쓰다 보니 타자의 준비 상태를 순간적으로 잘못 봤다는 것이다.
정규시즌 중에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1경기의 무게가 시범경기와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무겁기 때문에, 오히려 정규시즌에 들어가면 훨씬 더 빈번하게 벌어질 수도 있다.
KBO 심판진도 이런 가능성을 전부터 생각해 왔다. 김병주 심판위원장은 통화에서 “제한시간 안에서 타자가 아직 준비를 마치지 않았는데, 투수가 자기는 준비가 됐다고 공을 던지면 안 된다. 위험할 수 있고, 서로 예민해질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이 나오면 심판이 적극적으로 개입을 해서 공을 던지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타자가 타격 준비를 마치기 전에, 투수가 공을 던지려 한다면 곧장 타임을 외치고 끊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심은 타자의 준비 상태를 확인하면서, 동시에 투수의 동작까지 계속해서 살펴야 한다.
김태경과 박해민의 상황 당시 박종철 주심도 타임을 선언하고 투구를 막으려 했지만 순간적으로 늦고 말았다. 주심이 양팔을 옆으로 펼쳐 들었을 때 공은 이미 김태경의 손을 떠난 뒤였다. 조금 더 빠르게, 적극적으로 김태경의 투구를 막았다면 박해민이 흥분할 일도, 양쪽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몰려나올 일도 없었을 수 있다.

피치클록의 시대 야구 심판이 떠안은 새로운 과제는 이뿐 아니다. 투수가 피치클록 규정을 최대한 이용하려 할 때, 어떻게 제도 본연의 의미를 살리느냐도 심판의 몫이 됐다.
지난 10일 인천에서 열린 한화와 SSG의 시범경기가 그런 사례다. 한화 선발 코디 폰세는 4회 1사 주자 1루에서 박기택 주심에게 주의를 받았다. 박 주심은 피치클록 7초를 남기고 타임을 선언한 뒤 공을 좀 더 빠르게 던져달라는 손짓을 보냈다. 폰세는 피치클록 규정을 어긴 것도 아닌데 왜 그러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박 주심이 투구를 재촉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직전 투구 때도 폰세는 피치클록 제한시간이 다 되어 가도록 공을 던지지 않았다. 포수 최재훈이 시간 초과를 우려해 3초를 남기고 타임을 요청했고, 박 주심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폰세가 다음 투구 때도 세트 자세만 취한 채 공 던질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원활한 경기 진행을 위해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역시 정규시즌에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KBO는 올해 피치클록을 정식 도입하면서도, 투수의 투구판 이탈 횟수나 포수의 타임 요청 횟수에 따로 제한을 두지 않았다. 첫해부터 너무 엄격하게 제도를 적용하면 적응하기 쉽지 않다는 현장의 반발을 고려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피치클록을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극단적으로 가정한다면, 투수가 피치클록 위반을 피하려고 무제한으로 투구판을 이탈한다고 하더라도 규정만 따진다면 제재할 방법이 없다. 이런 경우에도 원활한 경기 진행을 위해 적절한 수준에서 관여하겠다는 게 KBO 심판진의 입장이다. 그러나 ‘규정을 어기지 않았는데 무슨 문제냐’는 반발이 나올 때 어떻게 설득하고 정리할지는 또 다른 과제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