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글이 설득력 없다고 느끼는 것은 글쓴이의 신념이나 이념에 동조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 글이 사고의 장치들을 제대로 마련 못 해 헐겁거나 혹은 거친 강제성을 띠기 때문이다. 한편 어떤 일기들은 역사책이 되고 문학이 된다. 일기는 자기 설득의 과정이다. 이때 ‘자기’란 타인이기도 하다. 내가 일종의 독자이기 때문이다. 그 타인의 내면을 뚫고 들어갔다 나올 때 건진 언어가 좋은 형식을 갖췄다면 그건 공적 유산이 된다. 대부분 일기를 쓰다 마는 것은 자신조차 설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타인을 대할 때의 초조함을 유지한다면 일기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문장의 가장 큰 적은 상투성
말의 변화 껴안을 용기 있어야
명료할 때까지 쓰는 집념 필요

글을 쓰는 것은 초조함을 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행위다. 이건 지적 초조함 그리고 직접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 가능/불가능한지 입증해야 하는 부담을 진다. 입증의 물적 기반은 문장이다. 그리고 문장의 가장 큰 적은 상투성이다. 내가 쓴 문장이라도 그게 상투적이라면 거기 담긴 생각은 대중에게서 온 것이다. ‘대중(세인)’은 누구나이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닌 자이기에 이런 글은 비윤리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상투성의 가장 큰 죄는 전환을 이뤄내기는커녕 지루함을 자아내는 데 있어, 독자가 그 문장이 없었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할 만큼 무(無)를 그리워하게 한다.
내게 요즘 가장 진부하게 느껴지는 문구는 ‘납작하게 보지 않기’다. 차별에 저항하려는 이들이 세상을 단면적으로 보는 기성의 인식과 싸우기 위해 이 단어를 유용하게 써왔지만 이제는 너무 흔해졌다. 게다가 글쓰기라는 것이 이미 세상을 납작하게 보지 않겠다는 조건을 전제하고 있어 굳이 반복할 필요가 없다. 쓰는 사람은 끊임없이 현대화되고 새로워지고자 하는 단어들의 충동과 운동을 짊어질 수 있어야 한다. 익숙한 것의 답습은 현실을 담아내는 효과를 떨어뜨리며, 표준에 가까이 있을수록 그것이 일으킬 충격은 미미해진다. 그중에서도 진부한 서술어는 문장 전체를 망친다. 뒤라스의 소설 『동네 공원』에 등장하는 젊은 가정부는 말끝마다 “(그렇게 되면) 저는 망한 거거든요”라고 하는데, 신간 소개문 등에서 자주 보게 되는 길게 늘이는 일부 서술어들은 글을 ‘망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곤 한다.
나는 최근 일제강점기에 군사 기지로 활용된 국내 여러 지역을 답사한 원고를 검토했는데, 숫자와 지형지물, 사료로 가득한 글인데도 아름답다고 느꼈다. 정확한 사실과 자료를 끝까지 파고드는 글이 부족한 요즘에는 이런 유형이 세상의 주류 흐름을 반대로 휘어 중간으로 오게 만드는 힘을 지닌다. 법학자 워드 판즈워스의 법률 도구에 관한 건조하고도 명쾌한 글들 역시 사고가 투명해질 때까지 글쓰기를 밀어붙인다. 이런 집념이 고유의 템포를 만들어내 미래 지속성을 확보한다.
에드먼드 포셋은 ‘자유주의적 좌파’에 속하는 영국의 저널리스트다. 그가 오늘날의 극우 이념을 목격하면서 역사 속 보수의 사상가와 정치인들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연구한 것이 『보수주의』다. 이 책을 편집할 때 나는 그가 소개한 보수 정치가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품게 되었다. 포셋이 자신과 정치적 입장은 다르지만 오늘날 우파의 포퓰리즘적 진부함을 떨치고 정신이 살아 있는 보수를 보여줘 좌·우파 모두 설득해보겠다는 각오는 사태 파악을 위한 진실성, 사유적 문장, 패배감과 허무의 감정을 배격하는 철저함으로 구현된다. 그러므로 그의 글은 보수가 더 보수다워지도록 만드는 한편, 좌파 자유주의자들에게는 보수를 이해하고 싶게끔 하는 마음을 자아낸다.
외부의 근거와 지지 없이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신뢰의 기반은 타인과 공동체에서 생겨나며, 존재의 집인 언어 역시 타인으로부터 생겨나는 권위를 지녀야 한다. 그 권위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답하기 쉽지 않으니 거꾸로 권위가 생겨날 수 없는 말부터 생각해보자. 내게 그것은 사고를 옛것으로 환원시키는 보수성, 아이러니 없는 소박함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인간의 가장 큰 특성인 ‘시간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 소박은 언뜻 향토적이며 향수를 품은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지지만,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끊임없이 단순 소박으로 돌아가려 한다면 그것은 가장 인위적인 것이 될 우려가 있고, 우리 현실을 감추거나 혹은 떠넘겨진 현실을 외면할 우려도 있다.
누구나 자기 시대, 자기 문화에 근거해 글을 쓰게 된다. 니체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예술가로서 정말 자신의 주관성을 드러내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대부분은 편안한 관습적 표현과 스타일로 자신의 주관성을 감춘다.” 글 쓰는 정신은 용기를 필요로 하며, 그래야만 스스로의 역사를 기획해나갈 수 있다. 이때의 용기는 ‘벌거벗은 진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예술이라는 겉옷을 통해 삶을 긍정하고 생성의 힘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