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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내용의 이야기를 하더라도, 주변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어도 허달호 대표는 선한 웃음을 짓는다. 단 한 순간도 얼굴에 웃음기가 가시지 않아서 얼굴이 원래 저렇게 생겼나, 아니면 저 얼굴 너머에 다른 무언가가 있나 의심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고 만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지나치게 솔직한 말과 행동과 태도에 21세기에도 이런 인류가 존재하는구나, 싶다.
세상의 모든 일은 음으로 양으로 서로 영향을 미친다. 그 영향력은 선한 모양새일 수도 있고 악한 듯하기도 하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누군가는 손해를 보는 일이 반드시 있다. 타인이 아니라면 자기를 갉아 먹는 방식으로라도. 그런데 그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이런 규칙을 깡그리 무시하는 것인 양 보인다. ‘돌봄’을 밑바탕으로 넉넉하지 않을지언정 어떻게든 주체적인 경제활동을 하고, 혜택을 받는 이가 돌봄의 대상이기도 하고 돌봄의 주체이기도 하면서 이타적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그의 개인사도 예사롭지 않다. 그래서 현재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역사를 공부하고 싶었던 고등학생이 책에서 읽은 세상에 분노해 학교를 때려치우고 노동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첫 번째 공장에서 부추와 배추를 구분하지 못해 뺨을 맞았고,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으로 현재에 이르렀다. 그가 살아가고자 했던 인생의 가치를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일에서 찾은 것이다.
2024년 5월 27일에 진행한 인터뷰를 늦게 소개하게 되었다. 달라진 내용이나 상황들이 있을 수 있지만 허달호라는 한 사람을 들여다보는 데에는 영향이 없을 것 같다. 50년 이상 살아온 그의 궤적은 대체로 일관성이 있었으므로.
Q. 자기소개 부탁한다.
울산에서 돌봄 사회적기업을 운영하는 허달호이다. 현재는 ‘도우누리’라는 노인복지센터 다섯 곳, ‘사단법인 아이누리’라는 아이들을 위한 지역아동센터 열두 곳,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돌봄 하는 ‘남구자활지원센터’ 한 곳을 운영하고 있다.
Q. 엄청나다. 그 정도 규모면 정말 기업 수준이다.
노인, 아동,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돌봄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회적기업으로 울산에서는 가장 큰 규모라고 할 수 있다.
Q. 요즘 어르신들을 모시고 병원 가는 서비스를 시작했다고 들었다.
2024년부터 ‘병원 동행 서비스’를 시작했다. 노인에게 한정하는 서비스가 아니라 누구나 신청할 수 있는 서비스이다. 65세 이상의 노인은 물론이고, 혼자 사는 이가 아픈데 돌보는 가족이 없는 경우, 병원 동행이 필요한 장애인, 젊지만 병원에 가야 할 때 당장 함께 갈 수 없는 사람 등 병원 동행이 필요한 모든 사람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Q. 수도권에서는 몇 년 전부터 시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차이점이 있나?
서울은 3년 전부터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데 그건 노인 1인 가구만을 위한 것이다. 난 울산에서 독창적인 모델을 만들려 했다. 65세 이상 노인들을 위한 공공 서비스뿐만 아니라 앞서 말한 모든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유료 사업도 포함되어 있다. 몸이 아파서 병원에 혼자 가기에 불편한 모든 대상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서비스의 범위가 서울보다 더 넓다고 할 수 있다.
Q. 이 서비스는 가족들의 만족도, 일자리 창출 등의 순기능이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가족들의 만족도가 가장 크다. 요즘은 핵가족 시대이고 대부분 직장을 다니는 등 생계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어서 집안에 만성적인 질환이 있는 환자가 있는 경우 정기적으로 병원에 함께 가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서 항암치료 같은 경우에는 20회 정도 꾸준하게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함께 사는 가족이 직장에 다니는 경우 한 달에 네 번, 다섯 번씩 빠지기가 어렵다. 시간적, 경제적인 손실도 크고 직장생활을 영위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 우리 서비스를 이용하게 되면 시간적, 경제적 만족도가 높아지게 된다. 또 우리는 일대일 개인 서비스로만 제공하기 때문에 동행하는 환자에 대한 서비스의 질이 높을 수밖에 없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만족도가 굉장히 높다.
병원 동행 서비스는 일자리 창출 면에도 기여하고 있다. 대체로 남성 요양보호사가 일자리를 얻기가 어려운 편이었는데 병원 동행 매니저를 통해 남성 요양보호사들의 일자리가 많이 늘어나고 있다. 남성 매니저의 병원 동행은 이동에 좀 더 안정감이 있고, 환자를 부축하거나 보살필 때 더 많은 힘이 필요한데 상대적으로 남성이 더 유리한 부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은퇴한 남성들의 좋은 일자리가 되고 있다. 물론 젊은 층이나 여성들에게도 좋은 일자리이다.
Q. 이런 일은 운영을 위한 수익 창출도 중요한 일이지만 봉사 정신이 없으면 안 될 것 같다. 병원 동행 서비스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오랫동안 노인 돌봄 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노인들이 병원에 가는 일이 많다 보니 가까운 병원에 한 시간 정도 다녀오는 건 돌봄 서비스의 일부로 도와드릴 수 있었지만, 병원에 다녀올 시간이 길어진다거나, 투석 같은 경우에는 일주일에 세 번 가야 하고, 한 번에 다섯 시간 정도가 필요했다. 돌봄 서비스 제공 인력이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병원에 다녀오는 걸 돕는 일은 제도적인 뒷받침이 필요한 일인 것이었다. 이런 문제점들이 항상 안타까워서 해결 가능한 방법을 모색하다가 그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던 거다.
Q. 아동, 노인, 소외계층 중심으로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난 학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거나 전문적인 교육을 받진 않았다. 아이엠에프(IMF) 사태 때 국가 차원에서 우리가 경제적으로 굉장히 고통을 겪었지 않나. 그때 일자리 창출에 대해 고민하는 시민사회 단체에서 책임을 맡게 되면서 지금 하고 있는 이 사업들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과 실천을 시작하게 됐다. 자활 지원사업의 시범사업을 내가 맡았고, 그 사업을 통해서 다양한 돌봄 사업을 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 거다.
Q. 오랜 시간 동안 별별 에피소드가 있었을 것 같다. 기억에 남는 감동적인 사례가 있는가?
지역아동센터에서 감동적인 일이 하나 있다. 2024년이 사단법인 아이누리가 설립된 지 딱 20년 되는 해이다. 제일 처음 문을 열었던 게 월봉지역아동센터였다. 다양한 사연을 가진 아이들이 우리 센터에 왔는데,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한 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는 선생님이 아침에 출근할 때부터 그 선생님과 종일 시간을 보냈다. 1년 동안 우리 센터를 이용한 후 다시 학교로 가게 된 이후로 학교에 잘 적응했다고 한다. 어느새 군대를 갔다 오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지금 자원봉사자로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20년 전부터 우리 센터에 왔던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고, 자기들이 변할 수 있었던 우리 센터에서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면서 굉장히 보람을 느낀다.
Q. 마음 아픈 일도 있었을 것 같다.
내가 점점 나이를 먹어서인가, 아니면 점점 쇠약해지는 모친을 봐서인가, 어르신들에게서 마음 아픈 일이 종종 있다. 주간보호센터를 운영하고 있는데, 어르신들이 자기 노후에 대해 직접 결정하지 못하고 자식들이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대로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어디 좀 아프거나 몸이 불편해지면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 거의 강제 입원처럼 진행하는 때가 제법 많다. 그런 걸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우리는 다 나이가 들지 않나. 요양병원이나 요양원도 분명히 공적 역할이 있다. 하지만 일상생활 공간에서 돌봄을 통해 어르신들이 좀 더 행복한 노후를 영위하는 방법들이 있다. 돌봄 서비스가 자본의 논리에만 따라 상품화되는 게 아니라 좀 더 인간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길 바란다. 그러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곧 구체화할 수 있을 것 같다.
Q. 여러 직업 가운데 봉사의 형태를 띠는 이런 일들을 하다 보면 가족의 도움 없이는 어려울 것 같다.
제일 큰 문제가 경제적인 부분이다. 보통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은 1, 2년 지나면 연봉도 올라가고 퇴직금도 쌓이고 그러는데, 우리 같은 경우에는 사회복지 환경이 굉장히 열악한 구조이다 보니 수입이 안정적이지 않다. 내가 운영하는 센터는 많아도 경제적으로 굉장히 열악한 상태이기 때문에 행정이나 사무와 관련한 전체 책임을 혼자 다 맡고 있다. 수익도 낮고, 낮은 수익이나마 일하는 사람과 시설, 사회에 또 환원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보니 개인적으로는 경제적 형편이 안 좋다. 그럼에도 이런 형편을 잘 이해해 주고 지지해 주는 가족들이 고맙다.
재밌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사회적으로는 내가 운영하는 센터들이 많으니까 굉장히 부를 많이 축적한 걸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소문으로 누리그룹 회장이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임대하고 있는 사무실이 태화로터리에 있는 ‘연세에이치’ 빌딩인데, 허달호의 성을 영문 이니셜로 쓰면 에이치(H)니까 허달호가 연세대학교 나와서 센터들을 운영하며 벌어들인 돈으로 그 건물을 샀다는 소문이 자주 들려온다. 난 연세대학교를 나오지 않았고 그 건물은 내 것이 아님을 밝히고 싶다.
Q. 개인적인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부인과 아이들.
이혼했다. 전 부인은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이다. 아이들은 아들 둘 다 장성해서 학교 졸업 후 외지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고, 현재 난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Q. 왜 이혼했나?
이혼할 때의 이유를 말한다면… 각자 소중하게 생각했던 관점이 달랐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만나 결혼했는데, 같이 살다 보니 삶에 대한 가치와 기준이 많이 달라서 맞춰나가는 데 어려움을 많이 느꼈다. 그래서 이혼하게 됐다. 지금 그 사람은 잘 지내고 있는 걸로 안다. 자기 자리에서 역할을 잘하고 있다고 듣고 있다.
Q. 노동운동을 했나?
울산의 많은 사람이 오해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내가 학생운동을 하다가 시민운동을 거쳐 지금의 사회복지 관련 일을 한다고 알고 있는데, 아니다. 난 바로 현장에 들어갔다.
난 고등학교 다닐 때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학교에 있는 게 아니라 사회의 문제 중심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해서 학교를 중퇴했다. 1987년 당시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났고, 와이엠씨에이(YMCA) 문학서클을 거쳐 신발 공장에 들어갔다. 군대에 갔다 온 뒤 울산에서 7년 정도 공장을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동참했다. 이후 환경운동연합, 생명의 숲 등의 시민운동을 거쳐 사회복지 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Q. 아이들은 누구와 살았나?
엄마와 생활했다. 엄마가 교사이기도 해서 잘 돌봤다.
Q. 그럼, 이혼 이후 계속 혼자 살았나?
이혼 후 죽 혼자 살다가 작년부터 어머니가 나와 살고 싶다고 해서 같이 살고 있다. 내가 셋째 아들이고 내 아래로 남동생 하나, 여동생 하나가 있다. 여동생이 산청에 살고 있는데, 어머니가 거기 가면 편안하게 살 텐데 사위가 불편한 건지, 내가 편안해서인지, 만만해서인지, 안타까워서인지, 그건 모르겠다. 사회운동 하는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물려준 거 하나 없으면서 나랑 같이 살러 왔다.
Q. 어머니 얘기로 넘어가 보자. 연세가 어떻게 되나?
40년생 용띠다. 어머니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곱 살쯤까지 일본에 살아서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이 일본의 영향을 좀 받은 것 같다. 이름은 김 씨로 한국식 이름을 가지고 있다. 어머니 집안이 좀 잘 살았던 모양이다. 일본에서 공장을 운영했고, 일본에서 대학을 나왔다고 한다. 한국전쟁 이후 재산이 다 소실된 것 같다.
Q. 막내아들이었으니까 예쁨도 많이 받았겠다.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고 공장에 다니니까 실망감 때문인지 혹독하게 대했다.
Q.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학교를 그만뒀나?
원래 내 꿈은 고고학자가 되는 거였다. 역사학과에 가서 고고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어릴 때부터 역사 공부를 굉장히 열심히 했다. 역사 전집도 읽고 위인전도 읽고 이런저런 역사책을 보며 공부하는 게 즐거웠다. 당시 학교에서는 근현대사를 안 가르쳤잖나. 그 내용들이 궁금해서 서면이나 경성대, 부산대 앞의 서점에 가서 역사책을 찾다가 <태백산맥>, <남부군>, 이런 역사 소설들을 접하게 됐다. 그러다가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책들도 접하게 됐다. 당시엔 정식으로 출판되지 않았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이런 책들. 학교에 편안하게 앉아 공부할 때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학교를 뛰쳐나왔다.
Q. 그 결정을 후회한 때가 없나?
첫 번째 공장에 가서 일주일 만에 후회했다, 뺨 맞고 나서.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맞았다. 냉동고에서 부추 가져오라고 했는데, 부추가 배추와 비슷한 건 줄 알았다. 냉동고가 워낙 넓어서 찾다가, 찾다가 보니까 배추는 없고 양배추가 보이길래 갖다주니까 나한테 집어던졌다. 내가 부산에 살았는데, 부산에선 당시 부추를 정구지라고 불렀기 때문에 난 부추를 몰랐던 거다.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간 공장에서 던진 양배추로 맞고 뺨을 맞아도 책에서 봤던 가혹한 현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너무 어린 나이에 노동운동의 현장으로 뛰어들어서 그런지 어른들은 노동의 고단함으로부터 나를 보호했고, 생각이 기특하다며 많이 예뻐해 줬다.
Q. 계획했던 일과 앞으로 몰두하게 될 일 하나만 소개해 달라.
병원 동행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시작 초기부터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하지만 기존에 하고 있던 노인 주간보호센터나 노인 방문 요양사업이 어려움을 크게 겪게 됐다. 다른 곳들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대기업들이 이쪽 분야까지 모두 진출하기 시작해서 기존에 이 사업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어렵게 됐다. 그런데 병원 동행 서비스를 통해 다시 많은 노인이 우리 쪽으로 다시 유입되고 있다. 그래서 2024년 초에 다섯 번째 센터를 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하는 일은 대기업의 대자본에 맞설 수 있는 지속 가능한 형태의 노인복지센터 모델을 만들어 확산하는 일이다. 우리 센터의 슬로건은 “어르신의 기쁨이 우리의 행복입니다”였는데 병원 동행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우리 동네에는 도우누리가 있습니다”로 바꿨다.
작지만 인간적인 삶이 있는 노인복지센터를 1년에 서너 개씩 만들어 갈 생각이다. 5년쯤 지나면 각 구·군마다 스무 개 정도의 센터가 있게 되고 노인들에게 더욱 촘촘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새로운 모델의 센터가 구축될 것이다. 이어서 2025년에는 우리가 복합 다기능센터라고 명명한 그룹-홈과 센터를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노인복지 모델을 만들 계획이다.
Q. 마지막 질문이다. 울산저널 독자들과 이사들에게 한 말씀 부탁한다.
이번 인터뷰를 보면 기존의 신문에서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형태이다. 방송국과 같이 분장하고, 조명이 많이 켜져 있고, 카메라도 여러 대가 돌아간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사람이 있고 영상을 촬영하는 사람이 있다. 울산저널이 그동안 울산에서 유일한 진보 신문으로서 많은 역할을 해왔는데, 앞으로는 많이 바뀐 신문 독자의 구독 생태계를 반영해서 지면에 치중하지 않고 영상을 활용하는 등 변화한 시대에 맞춰 시대가 요구하는 역할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시도해 봤으면 좋겠다. 새로운 시도와 이의 정착으로 울산저널이 울산을 대표하는 새로운 형태의 진보 언론이 되었으면 한다.
이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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