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벤처업계에서 최근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미증유의 통계 수치를 접하면 당혹감과 함께 먹구름이 몰려오는 듯한 위기감이 앞선다. 몇 년 전부터 너도나도 힘들다는 벤처 기업인들의 하소연이 이제는 통계로도 입증되고 있고, 그 숫자들이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2008년 말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와 2020년 코로나19 사태 등 엄청난 외부 충격에 한국의 대기업은 물론, 일반 중소기업들이 흔들릴 때도 벤처기업은 양적·질적으로 지속적인 우상향 성장 그래프를 보여줬다.
벤처기업들도 최악의 위기 상황
재앙 수준인 한국의 과잉 규제
정책은 현장과 실용주의 따라야

최근의 실상을 보면 먼저 기술 기반 창업기업의 숫자가 4년 연속 감소하고 있고, 전체 벤처기업의 영업이익은 사상 최초로 적자로 돌아섰다. 연간 벤처투자 총액도 2021년 최고점(15조9371억원) 대비 20% 이상 감소했다. 초기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도 급감하고 있다.
벤처 업계에 종사하는 기업인들의 체감경기 전망도 부정적인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벤처기업협회가 조사·발표하는 올해 1분기 기업경기실사지수(BSI) 전망치는 88.9였다. 2024년 4분기(110.7)보다 21.8포인트나 떨어졌다.
이러한 통계 숫자들은 그동안 대한민국 경제에서 혁신과 성장을 주도해 왔고 앞으로도 글로벌 무한 경쟁에서 국가대표 역할을 해야 하는 벤처기업들이 마주하고 있는 현주소다. 안타깝고 참담한 심정이다.
최근 정부와 입법부가 표방하는 경제 정책 곳곳에 민간 주도라는 단어가 자주 보인다. 그 자체만으로는 무척 반가운 일이다. 지금 4차 산업혁명의 한 복판에 서 있는 상황에서 과거처럼 공공부문이 모든 변수를 고려해 경제정책을 계획·집행하고 경제 주체들을 컨트롤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문제는 각론이다. 민간이 주도한다는 뜻은 시장의 혁신 지향과 역동성을 신뢰하고 참여자들의 합리적 선택에 의한 결과를 수용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조금 더 욕심을 내자면, 민간 혁신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와 국회는 실용성과 글로벌 흐름을 기준으로 낡은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 무엇보다 재앙 수준의 산업 규제를 과감하게 걷어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동안 모든 정부가 표방해왔던 규제 개혁은 수십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제자리걸음 상태다. 기존 법체계와 실제 산업 환경의 괴리 현상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혁신을 지향하는 벤처기업들이 보기에 한국의 규제 환경은 가히 재앙 수준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문제는 정책과 입법 당국자들이 추상적 관념에만 의존해 시장의 현실을 무시한 규제를 지속해서 양산하는 현실이다. 이로 인해 창업과 기업 혁신을 정면으로 가로막고 있어 문제가 여간 심각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타다 금지법’이 그러했고, 기업별 특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획일적으로 강행한 주 52시간 의무 시행이 그랬다. 플랫폼 기업에 대한 사전 규제 시도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규제는 기업 입장에서 보면 경악할 만한 것들이다. 이중 삼중으로 기업의 발목을 잡고 옥죄기 때문이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국회의 상법 개정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기업의 모든 이사가 회사와 주주의 이익에 충실하게 의사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관념은 얼핏 보기에는 아주 이상적이다.
그러나 정책과 법 입안자들이 경제 현장에 나와서 직접 경험해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이해관계가 다른 기업의 모든 주주의 이익에 충실하고, 동시에 기업의 과감한 의사결정을 지원해 혁신을 지속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왜 자본주의 역사가 긴 선진국들은 이런 이상적인 제도를 도입하지 않았는지 국회는 한 번이라도 생각해 봤을까. 이상적 제도를 악용하는 잠재적 위협은 없는지도 따져 봐야 한다. 이런 현실을 묵살·배제하고 모든 기업에 상법상 새로운 규제를 가한다는 것은 교조적 관념주의와 무엇이 다른가.
민간 시장에는 추상적 관념도, 정파적 이익도 존재하지 않는다. 민간 주도를 지향한다면 시장을 신뢰하고 현장주의와 실용주의 원칙에 따라 의사결정을 해야 마땅하다. 상법 개정안 몰아치기를 보면서 한 국회의원이 몇 년 전에 타다 금지법에 찬성했으나 현실을 인식하고 반성문을 올렸던 용기를 떠올리며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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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 벤처기업협회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