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노벨상의 쓸모, 혹은 망령

2025-10-24

10월의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면 어김없이 한바탕 열병이 한국사회를 휩쓴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낭독되는 몇몇 과학자의 이름이 지구 반대편의 나라를 통째로 들었다 놓는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2025년 노벨 생리의학상은 ‘면역 관용’의 비밀을 파헤친 메리 E. 브렁코, 프레드 램스델, 사카구치 시몬에게 돌아갔다. 물리학상은 거시적 양자 터널링 현상을 발견해 양자컴퓨터의 기틀을 닦은 미셸 H. 드보레, 존 M. 마티니스, 존 클라크가 수상했고, 화학상은 가스를 가두고 물을 수확하는 분자 구조물 ‘금속-유기 골격체(MOF)’를 개발한 기타가와 스스무, 리처드 롭슨, 오마르 M. 야기에게 수여됐다.

세계는 새로운 지적 영웅들의 탄생에 잠시 환호하고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한국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언론은 옆 나라 일본의 수상자 숫자를 헤아리며 자조 섞인 기사를 쏟아내고, 정치권은 ‘과학 강국’을 부르짖으며 공허한 약속을 남발한다. 온 국민은 마치 오래된 숙제를 해결하지 못한 학생처럼 집단적 패배감에 젖어 든다. ‘노벨상 병(病)’이라는 이름의 이 연례행사는 이제 너무나 익숙해서 병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한국사회의 노벨상에 대한 집착은 단순히 과학에 대한 열망이라기보다 압축 성장의 그늘에 남겨진 지독한 열등감과 서구로부터의 최종 승인을 갈망하는 후기 식민지적 욕망의 발현에 가깝다. 박정희 시대부터 이어진 ‘따라잡기’ 모델은 경제적 성공을 이뤘을지언정 문화적·지성적 주체성을 확립하는 데는 실패했다. 노벨상은 그 미완의 과제에 대한 서구의 확인 도장처럼 여겨진다. 이제 이 망령의 실체를 직시할 시간이다.

노벨상 수상자 명단을 파고들면 한국사회의 통념을 뒤흔드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노벨 과학상은 특정 민족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올림픽이 아니라 오히려 열린 사회가 거두는 지적인 수확물에 가깝다. 그 가장 명백한 증거는 이민자 수상자의 압도적인 비율이다. 2000년 이후 미국인이 수상한 화학·의학·물리학 분야 노벨상의 40%가 이민자에게 돌아갔다. 1901년부터 따져도 그 비율은 36%에 달한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장기적 추세다.

올해의 수상자 명단에서도 이 경향은 뚜렷하게 확인된다. 화학상 수상자인 오마르 M. 야기는 요르단계 미국인이다. 그는 요르단 암만에서 전기와 수도도 없는 단칸방에서 수많은 형제와 함께 자랐다고 한다. 그런 그가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의 교수가 돼 인류의 난제를 해결할 새로운 물질을 개발하고 노벨상을 받은 이야기는 한 개인의 천재성을 넘어 재능 있는 개인을 국적과 배경에 상관없이 받아들이고 최고의 연구 환경을 제공하는 미국사회의 저력을 보여준다.

이 통계가 말하는 바는 명확하다. 지적 자유와 충분한 연구비 그리고 무엇보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재들이 격의 없이 토론하고 협력하는 문화가 미국이라는 과학 생태계의 강력한 자기장으로 작동하며, 그 자기장이 세계의 두뇌들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이는 ‘순혈주의’에 기반해 국내 인재만으로 노벨상 수상자를 ‘만들어내려는’ 한국의 전략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지 폭로한다. 진정으로 노벨상에 근접하는 길은 우리만의 수상자를 길러내는 폐쇄적인 노력이 아니라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이 스스로 찾아와 연구하고 싶어하는 매력적인 지적 환경을 구축하는 데 있다.

노벨상은 과학의 역사를 쓰는 동시에 그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한다. 상은 단지 3명의 ‘영웅’을 호명함으로써 수많은 조력자와 선구자들의 기여를 지우고 과학을 소수의 천재가 이끄는 신화로 각색한다. 2025년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메리 E. 브렁코의 여정은 이 ‘고독한 천재’라는 신화가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그의 위대한 발견은 명문 대학의 상아탑이 아닌 1995년 시애틀의 생명공학 회사인 ‘다윈 몰러큘러’에서 시작됐다. 당시 그의 팀은 유전성 면역 질환을 앓는 ‘scurfy’라는 이름의 생쥐를 연구하고 있었다. 게놈 브라우저조차 없던 시절, 생쥐 유전학과 염기서열 분석을 통합하는 대담한 접근법을 통해 질병의 원인이 되는 유전자, FOXP3를 찾아냈다. 이 발견은 그 자체로 중요했지만, 노벨상으로 이어지기까지는 동료들의 연구와 연결되는 결정적 과정이 필요했다. 프레드 램스델 그룹이 이 유전자 돌연변이의 세포 수준의 결과를 분석했고, 사카구치 시몬이 앞서 발견했던 ‘조절 T세포’의 기능과 마침내 연결되면서 FOXP3가 면역계의 균형을 잡는 ‘마스터 조절자’임이 밝혀진 것이다.

브렁코의 이야기는 오늘날 한국 과학계가 숭배하는 ‘영향력 지수’나 ‘논문 편수’ 같은 지표들이 얼마나 근시안적인지 고발한다. 그의 핵심 논문은 2001년에 발표됐지만, 그 바탕이 된 연구는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끈질긴 과정의 산물이었다. 단기 성과에 집착하고, CNS 학술지 게재를 장원급제처럼 여기는 문화 속에서는 이처럼 길고 지난한 기초 연구가 뿌리내리기 어렵다.

우리 안의 과학을 키워나갈 때

더 근본적으로 노벨상은 과학의 성과를 평가하는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수많은 우연과 정치적 역학 그리고 시대적 한계가 뒤섞인 불완전한 시상식에 불과하다. 문화적으로 한국의 위상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왜 유독 과학만은 노벨상의 권위에 기대 일본의 수상자 숫자나 세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이제는 노벨상의 망령을 떠나보낼 때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구의 기준을 만족시키는 또 하나의 트로피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우리만의 과학이다. 과학을 경제 성장의 도구로만 여기던 박정희 패러다임을 넘어 과학을 민주주의를 지탱하고 사회적 합리성을 높이는 문화적 자산으로 인식하는 철학적 전환이 필요하다. 과학적 방법론이 시민의 교양이 되고, 과학적 사고가 사회적 논의의 기본이 되는 ‘과학적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만의 국가 철학을 세우고, 그 방식으로 묵묵히 과학적 성과를 쌓아나가면 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우리가 만든 기준으로 세계의 과학적 성취를 평가하고 상을 주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어차피 한국은 평화상과 문학상을 받았으니, 백범 김구 선생이 꿈꾸었던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의 소원은 이미 절반쯤 이루어졌다. 진정한 문화강국은 남의 상을 탐하는 나라가 아니라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나라일 것이다. 이제 노벨상의 계절에 마시는 집단적 열패감의 쓴잔을 내려놓고 우리 안의 과학을 키워나갈 때다.

<김우재 낯선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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