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처럼, 삼성 휴대전화에 내가 녹음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기술을 개발해 담을 수는 없습니까?”
지난달 29일 국민의힘 초선 공부 모임에서 나온 이달희 의원의 질문이다. 삼성전자 출신의 반도체 전문가 고동진 의원은 “그런 건 굉장히 쉬운 기술”이라면서도 “그런데 시장에 문의를 해보니까 싫어하는 분들이 더 많더라”고 답변했다. 이날 고 의원이 강연자로 나선 공부 모임의 주제는 ‘인공지능(AI)과 반도체’였지만, 의원들의 이목을 끈 질문은 이 의원의 휴대전화 녹음 관련 질의응답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국회의원들이 보안에 민감해한다는 걸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여의도 정가에 ‘보안 경보’가 발령됐다. 정치브로커 명태균씨로부터 촉발된 이른바 ‘녹취 리스크’ 탓이 크다. 명씨가 윤석열 대통령과 나눈 통화 음성은 누군가에 의해 녹음돼 흘러나왔고, 김건희 여사와 명씨가 나눈 텔레그램 메시지도 원문 그대로 캡처돼 공개됐다. 명씨가 유력 정치인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떠든 음성도 연일 생중계하듯 흘러나온다.
이에 최근 정치인들은 일반 전화는 아예 녹음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답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국민의힘의 영남 중진 의원은 13일 통화에서 “아주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라디오 인터뷰를 한다는 심정으로 문제 되지 않을 말만 정돈해서 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정치인들이 긴밀히 통화해야 할 경우 통화 기기로는 녹음이 불가능한 텔레그램이나 카카오톡 같은 SNS 음성통화를 사용하는 것은 이제 일반적이다.
메시지를 보낼 땐 주로 텔레그램을 사용하는데, 특정 기간이 지나면 대화 당사자에 남은 메시지가 모두 자동 삭제되는 기능을 즐겨 사용하는 이가 많다. 자신과 대화를 나눈 상대방의 휴대전화에 남은 대화방까지 모두 없애버리는 기능을 활용하는 경우도 잦다고 한다. 텔레그램이 메시지를 휴대전화가 아닌 서버에 저장하기 때문에 가능한 기능이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텔레그램을 주로 사용한다.
명씨 녹취록 출처 중엔 그의 운전기사가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며 정치권의 ‘차량 보안’도 한층 삼엄해지고 있다. 주요 당직을 맡은 국민의힘의 한 의원의 수행기사는 종종 조기 퇴근해 주변 동료들로부터 부러움을 산다고 한다. “의원이 운전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이유인데, 여의도 경력이 오래된 보좌진들은 “기사에게조차 동선을 숨겨야 할 행선지가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지난달 6일 친한동훈계 의원들의 저녁 모임 당시엔 장소 노출을 피하기 위해 다수의 의원이 택시를 이용했다고 한다. 국민의힘의 한 보좌관은 통화에서 “의원 차량 블랙박스를 내부 녹음 기능이 없는 것으로 교체하는 의원실도 있다”고 귀띔했다.
보안 민감도가 올라가면서 정치권에선 대화 상대방의 동의 없이 녹음하면 이를 처벌하는 입법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많다. 현행 통신비밀보호법은 대화 당사자의 녹음은 문제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만 부정적 국민 여론으로 인해 직접 발의에 나서는 의원은 드물다.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은 21대 국회 당시 상대방의 동의 없이 통화나 대화를 녹음할 경우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의 이른바 ‘통화녹음 금지법(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을 발의했다가 반대 여론에 부닥쳐 두 달 만에 철회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