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 깜짝하면 새해가 와 있고, 또다시 눈 깜짝하면 3월이더니 이어서 4월이 됐다. 부지런히 움직였던 것 같은데 돌아보면 게으름투성이다. 많은 사람이 내게 일중독이라는데, 글쎄다. 오지랖이 넓어서 그렇다. 그러곤 내 일을 뒤로 미루면서까지 다른 일 먼저 하다 보니 내 일에는 언제나 쫓기는 모양새가 된다.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무책임한 인간인 거지. 매일 다짐하길 이젠 제발 나에게 책임감 있는 삶을 살자, 하지만 제대로 지킨 적은 거의 없다.
비 오는 장면은 비가 오지 않을 때 찍어야 한다
영화를 촬영할 때 비 오는 장면은 만든다. 비가 오는 날엔 촬영을 못 한다. 장면을 통제할 수 없고, 고가의 장비를 다치게 하면 안 되고, 무엇보다 소리 문제가 크다. 장이머우 감독이 <연인>(2004)을 찍을 때 마음에 드는 장면을 재촬영하다가 어쩔 수 없는 계절의 변화로 마지막 장면이 바뀌긴 했다만 대부분 영화는 모든 장면을 통제한다.
프로듀서는 라인업에 한창이다. 우리가 가장 걱정하는 부분은 장마 기간이다. 올해 울산의 장마 기간을 보니 6월 20일경부터 7월 25일경까지다. 6월 초에 촬영을 들어가려니 시간이 너무 빠듯하고, 7월 말에 들어가려니 봄 장면이 아쉽다. 미리 촬영해 둔 게 많긴 하지만 빛이나 배경에 아무래도 아쉬울 것이다.
7월 말부터 촬영하려니 빛이 길어도 더위 때문에 금세 지친다. 8월 말부터 촬영하면 11월 말까지 완성해야 해서 편집에 애를 먹는다. 그림은 좋을 것이다. 6월 초와 9월 초로 쪼개 가는 것도 논의 중인데, 그렇게 되면 배우 일정과 배우 감정선에 일관성이 없게 된다. 배우 얼굴이나 스타일도 바뀔 수밖에 없고. 그리고 제작비가 더 많이 소요된다. 반구대도 여름과 가을엔 바쁘고.
영화란 자본과 시장과 타협해야만 한다
가장 확실하고 통상 쓰는 방법이긴 하지만 최선을 다해 찍지 않으면 된다. 시간에 맞춰 조금 얼렁뚱땅하면 된다. 살짝 눈을 질끈 감으면 되긴 한다. 하지만 그게 될는지 모르겠다. 다들 제 일에는 진심인 사람들이다 보니. 나 또한 타협하기 어려울 것이고.
하기야, 영화판에 도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박찬욱 감독이 <공동경비구역 JSA>(2000)를 필모그래피에서 빼고 싶다고 생각한다는데, 그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는 그 영화로 유명세를 탔고, 감독의 권위를 가졌고, 굳이 노출하지 않아도 될 장면에서 송강호의 성기를 누구나 볼 수 있게 노출했고(<박쥐>(2009)), 그리고 <공동경비구역 JSA>의 25주년이었던가 행사를 거하게 치렀으니. 자기 영화 세계에 진심이면서도 자본주의와 시장에 타협해 놓고, 그걸 부끄러워하면서도 마케팅에는 굉장히 잘 활용하는 아이러니.
영화라는 게 어쩔 수 없다. 자본이 들어오니 자본 쪽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
몇 주 만에 찾은 암각화 주변은 예뻐졌지만 처참해졌다
까망이의 여섯 번째 생일이기도 했고, 그래서 종일 까망이에게만 신경을 쓰고 싶어 마음이 동동거렸고, 지치기도 해서 바람도 쐬고 싶었고, 할 일은 많지만 그걸 핑계로 다들 놀고 싶었고. 그래서 카메라를 들고 다 같이 반구대로 올라갔다. 물론 반드시 따내야 할 인터뷰가 있었던 게 가장 큰 이유다.
반구대암각화로 들어가는 첫 번째 진입구인 오목교 옆에는 여전히 공사가 반년째 중단된 채였다. 트럭이 드나들 수 있게 대곡천을 배수로와 흙으로 덮어 놓았고, 트럭 바퀴 자국은 깊으면서도 오래된 모양새로 불편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수십 년 또는 수백 년 땅을 지탱하고 있었을 수많은 나무가 사라지거나 잘려 있었다. 반구대와 무관한 돌들이 조경물로 나란히 땅에 어설프게 박혀 있거나 여기저기 무덤을 만들고 있었다. 한쪽에는 진짜 무덤도 여럿 있었고.
그래. 솔직하게 예쁘긴 하더라. 아니, 예쁘다기보다 깔끔했다. 다만 대곡리만의 그 경관이 사라져 버렸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으로 바뀌어버렸다. 시나리오에 묘사해 둔 장면을 수정해야 할 판이다. 장면뿐만 아니라 대사와 설정도 바꿔야 한다. 이런, 젠장.
반구대는 어느 앵글을 잡아도 멋지게 나온다
햇수로 6년 동안 오가면서 처음 느꼈다. 어느 방향으로든 앵글을 잡아도 멋지다. 온 천지가 포토-존이다. 시간대도 상관없다. 새벽에도, 이른 아침에도, 한낮에도, 일몰 직전에도, 그리고 한밤중에도. 이유는 산의 실루엣 때문이다. 오목교에서 암각화로 가는 길 중간쯤에서 오른쪽을 바라보면 산의 모양이 특이하다. 거북이 모양인가 싶다가 곡(曲)자를 대고 칼로 도려낸 듯한 선이 무등산처럼 길게 이어진다. 자연적이긴 한데 조물주가 신경 써서 빚어낸 건가 싶다.
그 짧은 구간에 대나무가 만들어내는 길은 또 얼마나 멋진가. 서늘한 빛의 조화에 포근한 구도를 잡고 있다. 인공물로는 절대 불가능한 조합이다. 그래서 공룡 발자국으로 향하는 위태로운 길에 나무 덱을 깔아놓은 게 새삼스럽게 거슬렸다. 다른 방법은 없었나, 하는 거지.
암각화 가는 길뿐만 아니라 반구마을과 한실마을 모두 좁은 길이고 넓은 길이고 어딜 잡아도 다 예쁘다. 어떻게 각도를 그렇게 맞춰 놓은 것인지. 그저 희한하다.
카메라를 들고 원래는 금지해야 하는 구역으로 들어가니 여기저기 쓰레기가 흩어져 있었다. 대형 트럭과 이런저런 특수차량들이 드나들 수 있게 길을 내놓았으니 들어갈 수밖에. 그래도 여기저기의 광경을 담으면 그 쓰레기들은 먼지만큼 작게 보여 앵글 안에서만큼은 대곡리가 평화롭다.
반구대 주민들은 산불에 대비한 대안을 가지고 있다
오후 5시쯤 올라갔더니 대곡댐 물을 방류한다고 수위가 높아지면서 바닥의 흙이 깔끔한 물을 누렇게 만들었다. 그마저도 멋져 보였다. 그리고 촬영을 끝낸 뒤 되돌아 나오는 길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송이 나왔다. ‘~습니다’, ‘바랍니다’만 제대로 들렸지만 도통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 방송을 왜 하는 건지 모르겠다. 다만 ‘산불’이란 단어가 뭉그러뜨려진 채로 들렸는데, 그래. 이번 산불에서 피해 안 봤길 얼마나 다행인지. 미리 챙겨야 할 내용이 아닐까 싶다. 그러잖아도 주민들이 지난해 말부터 준비했던 유튜브 방송에 이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고 말을 해 두었으니 정비하는 김에 관에서도 관심을 가지면 좋을 것 같다.
대곡리는 늙어만 간다. 아픈 사람이 늘어난다
유네스코 등재에 속상해하는 주민들이 있다. 그들은 소외되지 않길 바란다
어제 올라갔다가 새로운 몇몇 소식을 듣게 됐는데, 하나는 대부분 반구마을 논농사를 짓던 이가 허리와 고관절이 아파서 농사를 지금까지처럼 많이 못 짓게 될 거라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유네스코 등재에 마을 주민들이 소외된다는 한탄이며, 민물어업권 문제로 관과 신경전을 벌여오던 누군가가 농약을 들고 가서 자살소동을 벌였다는 이야기다.
처음 촬영을 시작했을 때 60대 중반이었던 이가 어느새 70대가 됐고, 객관적으로 보기엔 관에서도 주민들을 배려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 중이지만 여전히 근본적으로 아쉬운 점이 많으며, 부모 대부터 민물고기로 생계를 이어온 자가 20년을 넘게 관과 법적인 문제로 진통을 겪어 왔는데 해결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미 아이가 태어나지 않은 지 수십 년이 된 이 마을에 10년만 더 지나면 원주민이 거의 남지 않고 땅 주인만 남게 될 것이다. 반구대의 수십 년 역사를 기억하는 이들이 늙어버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대한민국 모든 명승지나 유네스코 등재지와 구별되지 않도록 비슷비슷한 모양새로 개발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수많은 일자리에는 용역회사의 비정규직이 자리 잡게 될 것이고, 반구대의 지역성과 장소성을 고려하지 않고 수익만을 좇는 장사치들이 즐비하게 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카메라를 통해 사계절을 기록하고 그들의 목소리와 모습을 담아낼 뿐이다. 이거라도 할 수 있는 게 다행일는지. 그래서 다수의 주민과 반구대를 걱정하는 적지 않은 이들은 차라리 유네스코 등재가 한두 해 정도 미뤄졌으면 하고 소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민정 기자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