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명 외딴 섬에도 ‘주치의’ 있다…일본 2009년 만든 이 제도 덕 [닥터로드]

2024-10-24

의대 입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국내 의대는 점점 ‘1등들의 리그’가 되고 있다. 반면, 해외에서는 다양하고 독특한 방식으로 의사를 선발·양성하는 시스템이 존재한다. 중앙일보 특별취재팀은 다양성과 책임감, 전문성을 척도로 삼는 해외 의대의 ‘닥터로드’를 따라가면서 한국의 의사 교육에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 지 살펴봤다.

특별취재팀 =천권필·최민지·이후연·정은혜·서지원 기자 feeling@joongang.co.kr

일본 류큐대 의대에 재학 중인 시마부쿠로 쇼고(23) 씨는 오키나와현 북부의 산골 마을 출신이다. 의료 취약 지역으로 분류될 만큼 의사를 만나기 어려운 곳이다. 고교 시절 우연히 의료 봉사를 온 류큐대 의대생들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달라졌다. ‘지역정원제로 의사가 되면 고향에서 의사로 일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때부터 의사를 꿈꿨다.

2019년 ‘낙도(落島)·북부’ 지역정원제 전형으로 합격해 의대생이 됐고, 내년 졸업을 앞두고 있다. 지난달 17일 류큐대 의대 캠퍼스에서 만난 그는 “졸업 후 마을로 돌아가 ‘고향 의사’가 될 생각을 하면 벌써 벅차다”며 “나 같은 학생들이 점차 늘어나 오키나와 지역 곳곳의 의료 접근성이 높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키나와현은 동서 1000㎞ 길이의 바다에 펼쳐진 160여 개 섬으로 이뤄져 있다. 사람이 사는 섬은 40여 개인데, 이 중 20곳에는 최소 1인 이상의 의사가 상주하는 진료소가 설치돼 있다. 주민 수가 300명도 되지 않은 외딴 섬에도 주치의가 있다. 츠츠이 마사토 류큐대 의대 학장은 “오키나와와 류큐대가 지역정원제를 통해 만들어낸 성과”라고 했다.

섬 많은 의료 불모지인데…“타 지역 학생도 오키나와에 남아”

일본에서는 오래전부터 지역 의료의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해 왔고, 의대 지역정원제는 그중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평가된다. 2009년부터 본격 시행한 지역정원제는 의대 졸업 후 해당 지역 의료기관에서 근무할 학생을 선발·교육하는 제도를 말한다. 의대 졸업 후 9년 정도를 의무적으로 일해야 한다. 지난해 기준 의대가 설치된 80개 일본 대학 중 71개 대학에서 지역정원제로 학생을 뽑았다.

오키나와현은 섬이 많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지역정원제가 성공적으로 운영되는 지역으로 꼽힌다. 오야 유스케 류큐대 부속 병원장은 “최근 몇 년간 지역정원제로 입학한 학생 중 의무 근무 계약을 깨거나 섬·벽지 근무를 기피한 경우는 없다”며 “지역정원제가 아닌 일반전형 입학생 중 졸업 후 오키나와에 남겠다는 다른 현(지역) 학생들도 10~20% 정도”라고 했다.

“단순한 의무 아냐, 지역 전문가로 키우는 게 목표”

류큐대에서 만난 의대 교수들은 의대 재학 시절부터 ‘지역 의사’가 만들어진다고 했다. 류큐대는 매년 약 110명의 의대 학생을 모집하는데, 이 중 15명(13%)을 지역정원제로 뽑는다.

지역정원제 학생들은 교육과정부터 일반전형으로 입학한 의대생과 다르다. 학부 3학년 때 외딴 섬·벽지 등 의료 인프라가 부족한 지역에 1~2주씩 현장 실습을 간다. 이때 의료 실습뿐 아니라 금연 캠페인, 아동 의료·교육 봉사까지 다양한 활동을 한다. 지역 축제에도 참여해야 한다. 츠츠키 학장은 “학부 시절부터 지역 의료 현장 체험, 외딴 섬 실습을 통해 모든 것을 다 해야 하는 지역 의사로서의 전문성을 키울 수 있다”고 했다.

대학뿐 아니라 행정기관도 참여해 의대생을 ‘지역 전문가’로 키운다. 지역정원제 학생들은 입학 후 행정기관장과 만나 지역 전문 의사로 일해줄 것을 당부 받는다. 지역 의료 정책에 관한 의사 결정을 할 때도 의대생 또는 의무 근무 의사에게 자문을 듣는 경우도 있다.

오야 유스케 류큐대 부속대학 병원장은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지역의 전문가로서 긍지와 보람을 느끼게 하는 게 우리의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했다.

의무 근무 관두면 “사실상 재취업 어려워”

선발된 학생들의 자부심도 높다. 경쟁률은 일반전형과 비교해 3분의 1 수준 정도로 낮지만, 실력이 뒤처질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선 “그렇지 않다”고 단언했다. 지역 의료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싶어서 일부러 의무 기간을 감수하고 지역정원제에 지원하는 ‘성적 높은’ 학생들도 있다고 한다. 류큐대 의대 6학년 킨조 나기사(25)씨는 “입학 때 경쟁률이 의사로서의 실력 차이로 이어진다고 보지 않는다”며 “학생들 사이에서도 입학 전형으로 인한 차별이 전혀 없다”고 했다.

물론 의무 기간을 채우지 않을 때의 ‘페널티’도 세다. 그동안 받았던 지원금을 모두 상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재취업에도 제한이 있다. 츠츠이 학장은 “다른 현에서 일하려고 해도 취업하는 병원 측이 보조금을 삭감당하는 등 제재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며 “선의와 믿음만으로 지역 의료 인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교육을 통한 긍지와 확실한 보상, 그리고 페널티가 적절하게 운영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4억 연봉에도 지방 안 오는 한국 “지역정원제 도입 검토해야”

지역의료 붕괴 위기에 처한 한국 역시 지역정원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최근 경북 안동시의 공공의료기관에서는 내과 의사 채용에 연봉 4억 5000만 원을 제시했지만 결국 의사를 구하지 못했다.

경상국립대 등 일부 대학에선 내년도 입시부터 지역정원제로 학생을 선발하려고 했지만, 직업 및 거주 이전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의료계 반대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구혜경 국회 의회정보실 해외자료조사관은 “일본은 지방활성화 차원에서 의대뿐 아니라 사범대학 등 다양한 전공으로 지역정원제를 확대하는 추세”라며 “우리나라도 지역·필수의료 붕괴를 막기 위해 일본 지역정원제 운영의 다양하고 유연한 측면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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