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개발특구가 ‘혁신 창업’ 중심 되려면

2005년 3월 31일 대덕연구단지, 노무현 대통령은 대덕을 미국 실리콘밸리와 같은 연구개발(R&D) 클러스터로 발전시키겠다는 비전을 선포했다. 이날 선포식에선 한국 최초 휴머노이드 로봇 ‘휴보’가 노 대통령과 함께 개막 버튼을 눌렀다.
20년이 지난 현재, 대덕연구개발특구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했다. 연구개발특구에서 출발한 스타트업이 코스닥 시가총액 상위 10위 중 7개를 차지하고 있다. 2005년 8500억원에 불과한 특구 내 상장기업 시총은 현재 50조 8000억원을 넘어 약 60배로 불어났다.
대덕특구 기업 시총 60배 성장
코스닥 상위 10위 중 7개 배출
추가지정 전국 14개 강소특구
대부분 매출·투자 성과 부진
보스턴 바이오 클러스터처럼
대덕·홍릉 등 되는 곳 집중해야

알테오젠·펩트론·리가켐바이오·HLB·인투셀 같은 제약·바이오기업부터 2차전지(에코프로비엠), 로봇(레인보우로보틱스), 인공위성(쎄트렉아이), 인공지능(마음AI) 등 첨단 업종을 망라하고 있다. 대덕특구 비전 선포식에 등장한 휴보를 개발한 레인보우로보틱스는 코스닥 시가총액 6위(5조 1992억원)로 한국을 대표하는 로봇기업으로 성장했다.
정부연구소와 KAIST 기술이 성장동력

대덕연구개발특구의 특장점은 한국원자력연구원·전자통신연구원·항공우주연구원·생명공학연구원 등 정부출연 연구소와 KAIST의 기술을 바탕으로 창업한 연구소기업이 많다는 것이다.
국내 건강보조식품 1위 기업인 콜마비앤에이치(옛 선바이오텍)는 한국원자력연구원으로부터 기술을 이전받았다. 원래 방사선 치료후 고통받는 환자를 위해 50억원의 연구비를 들여 개발한 기술인데, 한국콜마가 면역기능 개선제로 상품화한 것이다. 콜마가 만든 이 상품의 누적 판매액은 2조원, 연수출 1억 달러를 넘기는 ‘대박’을 터뜨렸다. 국책연구소의 기술이 민간기업으로 넘어가 부가가치를 창출한 연구소기업의 성공사례다.
인공위성 기업 쎄트렉아이도 KAIST 인공위성센터에서 태어났다. 최초 국산 위성인 ‘우리별 1호’ 의 주역인 KAIST 연구원 7명은 1997년 외환위기로 연구비가 삭감되자 국내 첫 민간 위성기업을 창업했다. 김병진 쎄트렉아이 의장 등 창업멤버들은 위성 연구로 유명한 영국 서리대학교로 국비 유학을 다녀왔다. 김 의장은 KAIST 연구원 시절 10년간 받은 연구비가 100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그는 “우리는 국민의 세금으로 유학해 위성 제작기술을 배웠고 그 기술을 통해 다시 국가에 기여하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2005년 말레이시아에 소형위성을 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싱가포르·UAE·튀르키에 등에서 실적을 쌓았다. 쎄트렉아이는 EU의 에어버스, 영국 서리대학 산하 SSTL과 함께 세계 3대 중소형 위성제작업체로 성장했다.
세계 우주산업은 2030년 5900억 달러(810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송월타올의 자회사 송월테크놀로지는 탄소섬유·유리섬유 등을 혼합한 초경량 복합재를 만든다. 쎄트렉아이와 미국 보잉, 브라질 엠브라에르 등 항공기 제조업체에 납품할 정도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만약 쎄트렉아이 같은 위성을 만드는 국내 스타트업이 없었다면 송월테크놀로지 같은 소재 기업도 태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2023년 한때 현대차 시가총액을 넘어섰던 에코프로비엠도 한국화학연구원으로부터 리튬인산철(LFP) 양극재 기술을 이전받았다.
글로벌 R&D 특구로 성장하려면

문재인 정부는 안산·김해·창원·진주·포항·청주·구미·군산·나주·울주·홍릉·천안·아산·인천·춘천 등 14개 강소연구개발특구를 지정했다. 이 가운데 서울에 있는 홍릉강소특구는 출범한지 얼마 안 됐는데도 눈에 띄는 성과를 내고있다.
특구 안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고려대·경희대 등 연구기관·대학이 밀집해있고, 서울대·고려대·경희대 병원 등 제약·바이오 임상연구를 할 만한 대형병원이 많기 때문이다.
KIST 출신 연구소기업인 큐어버스는 먹는 형태의 치매 치료물질을 개발해 이탈리아 제약사 안젤리니파마와 5000억원 규모의 기술 이전 계약을 성사시켰다. 엔도로보틱스는 고려대병원과 협업으로 내시경 수술로봇을 개발해 세계시장 진출을 앞두고 있다. 고려대에서 기계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김병곤 대표는 “고려대 안암병원의 소화기내과 교수님들이 내시경수술로봇 성능을 구현하는 데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강소특구는 ‘특구’라는 이름을 붙이기 민망한 수준이다. 바이오의약특구로 지정된 강원춘천강소특구는 매출액 101억원, 고용 창출 효과는 53명에 불과하다. 만약 강원도에 바이오의약특구를 지정하려면 춘천보다는 연세대 의대와 연세기독병원, 건강보험공단·건강보험심사평가원 등 보건의료 기관이 몰려있는 원주가 입지조건이 좋았다. 삼성바이오로직스·셀트리온·SK바이오 등 바이오기업이 몰려있는 인천은 제약·바이오 연구개발특구로 지정될 만한데 빠져있다. 송도엔 연세세브란스병원이 들어올 예정이다. 다리 하나 건너면 되는 시흥 배곧신도시엔 서울대 시흥캠퍼스 의료바이오 연구개발 클러스터가 구축된다. 송도는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외국인들이 정주할 수 있는 교육여건도 국내에서 가장 완벽하다. 싸토리우스, 머크, 얀센백신 등 글로벌 의약기업들이 송도에 진출한 이유다. 만약 바이오의약특구를 추가 지정한다면 송도를 선택하는 게 투자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2005년 당시 노무현 정부는 10년 뒤 대덕특구내 외국연구기관을 2곳에서 20곳으로, 나스닥 상장기업을 0개에서 20개로 늘리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밝혔다. 이를 위해 대전국제학교를 유치원 초·중·고 과정으로 확대하고, 외국인학교 2~3곳을 2009년까지 추가 설립하는 등 당시로선 파격적인 대책을 발표했다. 또 장기적으로 외국인전용병원을 설립한다는 계획도 마련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대덕특구는 비약적인 성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의 글로벌 계획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1958년 설립된 대전외국학교 이외 외국인학교는 추가로 설립되지 않았다. 외국인전용병원도 들어오지 않았다. 대덕특구에서 코스닥 기업은 많이 배출했지만 미국 나스닥에 상장된 글로벌 기업은 나오지 않았다.
부동산에 몰린 돈, 혁신 창업에 돌려야

글로벌 스타트업 투자는 AI 스타트업에 막대한 자금이 쏠리면서 지난해 4분기 901억 달러에서 올해 1분기 1209억 달러로 급증했다. 반면 한국의 스타트업 투자는 크게 위축되고 있다. 2023년 3분기 2조 2956억원으로 정점을 찍은 이후 내리막을 보이고 있다. 올 2분기는 9201억원에 그쳤다.
국내 최고가 아파트인 반포 원베일리 단지 2990세대를 현 시세로 합치면 23조~24조원에 달한다. 코스닥 1위 기업 알테오젠의 시가총액(24조 3266억원)과 비슷하다. 한국의 금융이 AI혁명 등 미래에 대비한 생산적인 분야로 흐르는 게 아니라 비생산적인 부동산에 쏠리고 있다는 증거다.

미국 보스턴 캔달스퀘어(Kendall Square)는 세계 바이오산업의 허브로 불린다. 캔달스퀘어의 면적은 한국 판교테크노밸리보다 작다. 이 작은 면적에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한 모더나를 비롯해 노바티스·화이자·사노피·바이오젠 등 글로벌 제약사와 1000여개 스타트업이 몰려있다.
캔달스퀘어에서 수많은 바이오스타트업을 길러낸 요하네스 프루에하우프 랩센트럴 회장이 10일 대전 KAIST에서 열린 ‘혁신창업국가 대한민국 국제포럼’에 참석해 기조강연을 했다.
그는 캔달스퀘어의 성공요인으로 학계와 스타트업·인큐베이터·제약사가 한 공간에 밀집해 긴밀히 협력하는 구조를 꼽았다. 연구자가 연구개발 결과를 바탕으로 창업하고 기업을 키운 뒤 다시 학계로 돌아가는 유기적 순환 구조가 가능한 지리적 근접성과 네트워크가 핵심 성공 요인이라는 것이다.
이재명 정부 국정기획위원회는 연간 40조원 이상의 벤처 투자시장을 조성하고, 지역 균형 성장을 위해 창업도시 10곳을 조성하기로 했다. 연구개발투자와 벤처투자를 확대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대덕·대구·광주·전북 등 광역특구와 14개 강소특구에다 10개를 추가하는 게 혁신 창업을 진흥하는 데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다. 클러스터는 말 그대로 관련된 분야의 기업·연구기관이 응집해야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정부는 국내의 지역균형적 관점이 아니라 글로벌 경쟁력 관점에서 한국의 혁신 창업 클러스터 전략을 짜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