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시내에 아주 매력적인 핫플레이스가 있다. ‘동궁과 월지’이다.
야경, 은은한 달빛에 비치는 ‘연못(월지) 위의 데칼코마니 뷰’는 절로 감탄사를 자아낸다.
그런데 이 ‘동궁과 월지’ 명칭은 좀 나이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낯설다. 오랫동안 ‘안압지’ 명칭에 길들여져 왔기 때문이다.
‘안압지’는 기러기(안·雁)와 오리(압·鴨)가 뛰노는 연못(지·池)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꼭 50년 전인 1975년 이 연못에서 ‘주색잡기에 빠진 신라 태자’를 상징하는 유물 2건이 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그것이 오해였다는 고고학 방증자료가 발표되었다. ‘동궁과 월지’에 담겨있었던 ‘오해와 진실’을 한번 풀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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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태자궁?
이 연못은 1351년 전 조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674년(문무왕 14) 2월에 궁궐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삼국사기> ‘신라본기·문무왕조’)고 했다. 명칭은 없었다.
다만 “931년(경순왕5) 경순왕이 경주를 방문한 고려 태조를 위해 임해전에서 환영연을 베풀며 ‘후백제 견훤 때문에 못살겠다‘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삼국사기> ‘경순왕조)는 등 임해전에서 펼친 국가 행사 및 연회 등의 기사가 잇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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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는 “안압지 서쪽에 임해전 터가 있는데, 주춧돌과 섬돌이 남아 있다”고 정리했다. 그런데 이렇게 ‘안압지’ 혹은 ‘임해전터’로 알려진 경주 시내 인공연못은 2011년 사적 ‘동궁과 월지’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왜 그랬을까. ‘동궁(東宮)’은 예부터 ‘동쪽의 궁’이 아니라 태자와, 그 태자가 거처하는 궁을 뜻했다. 왜냐.
“동쪽은 봄을 의미하니, 만물의 생장은 동쪽에 있다. 서쪽은 가을을 의미하니 만물의 성취는 서쪽에 있다. 이에 임금은 서궁에, 태자는 항상 동궁에 머물기 때문이다.”(공영달·574~648의 <춘추좌전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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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동궁’ 유물
그럼 경주의 ‘동궁과 월지’는 신라 태자와 관련된 궁궐과 연못이라는 말인가.
그렇다는 게 통설이었다. 왜냐. 1975~76년 안압지 발굴 결과 연못의 서·남쪽에서 무려 31동의 건물터가 확인됐다.
새삼 ‘674년 궁궐 안 연못 조성’ 기록과 함께 5년 뒤(679)의 <삼국사기> 구절에 눈길이 갔다.
“679년(문무왕 19) 2월 궁궐을 중수했는데, 매우 웅장하고 화려했다. 그해 8월 동궁을 창건했고, 비로소 궁궐 안팎의 여러 문 이름을 정했다.”(<삼국사기> ‘문무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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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기록을 뒷받침하는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연못 건물지에서 출토된 ‘의봉4년개토(679)’명 기와와 ‘조로2년(680)’명 전돌이다. ‘의봉’(676~679)과 ‘조로’(679~680)는 당나라 고종(650~682)의 연호다. 동궁의 창건 연대와 딱 들어맞는다.
또 연못 출토 명문 유물이 눈길을 끌었다. ‘동궁아일(東宮衙鎰)’명 자물쇠와, ‘태자(太子)’명 목제 뚜껑, ‘태자군(太子君)’명 목간 등이 그것이다. ‘동궁아일’ 자물쇠는 동궁을 관리하는 관아와 관련된 유물로 인식됐다.
“752년(경덕왕 11) 동궁아(東宮衙)와 동궁관 등을 설치했다”(<삼국사기>)는 역사기록과도 부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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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태자’와 관련된 명문유물이 나왔으니 ‘동궁=태자궁’일 가능성을 높였다.
‘세택(洗宅)’명 목간, ‘용왕신심(龍王辛審)’ 및 ‘신심용왕(辛審龍王)’명 접시, 20여 점에 달하는 불상 등의 출토도 심상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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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가 동궁관 소속 부서를 열거하면서 ‘세택·용왕전·월지전·월지악전·승방전’ 등을 거론했다. 그러니 연못에서 출토된 명문 유물은 ‘동궁’과 관련된 유물일 수밖에 없다고 인식됐다. 태자가 거처한 ‘동궁=월지궁’일 가능성이 짙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822년(헌덕왕 14) 왕이 동모제(어머니가 같은 동생) 수종(흥덕왕·재위 826~836)을 태자(저이·儲貳)로 삼아 월지궁에 입궁시켰다”(<삼국사기> ‘헌덕왕’조·열전 녹진’조)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월지궁=태자궁’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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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동궁’에서 보이는 국왕의 체취
하지만 이 ‘동궁과 월지’와 관련해서 꺼림칙한 부분도 있었다.
‘동궁=태자궁’ 등식이 맞는가. 혹시 그냥 월성의 동쪽에 조성된 것을 의미하는 동쪽 궁궐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가. 왜 그런 근본적인 회의감이 나왔을까.
무엇보다 <삼국사기> 등 문헌기록은 태자궁의 위치를 ‘콕 찝어’ 특정하지 않았다.
결국 고고학 발굴결과로 태자궁으로 인식된 동궁의 위치를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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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보지로 ‘동궁과 월지’ 영역의 서쪽과 남쪽에서 확인된 31개동의 건물군이 지목되었다.
문제는 이 건물군의 규모와 위상이 태자급을 넘어 국왕급이라는 것에 있다.
이중 서쪽 건물군 중 회랑으로 둘러싸인 공간 안에 큰 건물 3채가 전-중-후 3중으로 배치된 게 심상치 않다. 이런 구조는 당나라 대명궁의 3조(함원전·선정전·자신전)와 흡사하다. 혹은 대명궁 안의 온실전(溫室殿) 구조와도 비슷하다.
이중 맨 앞의 A건물지는 ‘171평(7칸 29.1m×4칸 19.4m)’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전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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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 조성을 위해 1.5m 정도 흙을 높이 쌓고 다진 흔적이 보였다. 또 건물 앞에 어가(임금의 가마)의 출입을 돕는 답도(계단석)가 조성되어 있다. 또 건물 한가운데는 기둥을 조성하지 않았다. 임금이 앉을 수 있는 어좌가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임금과 신하가 조회할 수 있도록 회랑의 공간을 넓게 조성한 것도 눈길을 끈다. 또 이 건물은 7세기 이후 증·개축이 없었고, 신라멸망 때까지 지속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679년(문무왕 19) 2월 궁궐을 중수했고, 또 그해 8월 동궁을 창건했다”는 기사가 귓전을 때린다. 7세기말, 즉 679년에 ‘궁궐 따로, 동궁 따로’ 중수(궁궐)하고, 창건(동궁)했다는 얘기가 아닌가.
여기서 언급한 궁궐이 월지 서쪽의 A건물은 혹시 아닐까. 왕이 정사를 펼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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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습을 드러내는 태자의 흔적
월지와 그 서쪽 및 남쪽이 ‘태자’가 아닌 ‘왕의 공간’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정설이었던 ‘동궁=월지궁=태자궁’설은 어찌 되는 건가.
안개속에 빠졌던 궁금증은 2007년 이후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발굴조사 결과 월지 동북쪽에서 40여동의 건물지와 19개의 담장터, 3기의 우물이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66평(4칸 16.4m×3칸 13.2m) 규모의 대형 건물지가 눈길을 끌었다. 또 동문으로 추정되는 건물도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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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는 특히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폐쇄식 화장실 1동이 발견되어 화제를 뿌렸다.
건물 안에 설치된 이 화장실은 원형 석조 변기와 직사각형 상부 디딤돌 2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변기 한가운데 설치된 구멍을 통해 흘리는 오물은 경사진 배수로를 통해 자연스레 처리될 수 있도록 설치되었다. 최초의 수세식 화장실이라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우물과 창고와 같은 생활공간이 확인되었다.
상아 주사위 1점과 함께 순도 99.99%를 자랑하는 ‘금박화조도’도 발견됐다. ‘금박화조도’는 두께 0.04㎜의 작은 금판에 0.05㎜ 이하의 선으로 한 쌍의 새와 꽃(團華·둥근 꽃무늬)을 새긴 장식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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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공간, 태자의 공간
발굴단(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은 이 공간이야말로 태자궁과 관련된 시설이 아닐까 기대를 품게 되었다. 그것은 리허설에 불과했다.
2020년부터 진행된 월지 동편에서 비로소 ‘태자의 공간’일 가능성이 짙은 독립공간을 확인했다.
즉 익랑과 회랑으로 둘러쌓인 대형건물과 건물 앞부분에 조성된 넓은 마당, 그리고 부정형의 연못 등을 세트로 갖춘 공간이었다. 이중 대형건물은 166평(5칸 25m×4칸 21.9m)에 이르렀다. 건물 남쪽에 월대(궁궐 건물 앞에 설치하는 기단)를 3.8m 정도 증축한 흔적도 보였다. 건물 계단도 5개가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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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석재로 외곽의 틀을 잡고, 작은 강돌과 기와시설, 그리고 배수가 원활한 마사토로 정돈한 마당시설도 눈길을 끈다.
이 공간 구성을 마무리한 시설물은 인공 연못이다. 아직 너비 43.56m, 길이 17.2m 정도만 확인되었다. 연못의 한가운데와 남쪽에 섬 2곳을 조성해놓았다. 섬의 주위는 조경석으로 둘렀으며, 가운데 바닥은 암키와로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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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건물군+마당+인공연못’ 등을 갖춘 공간세트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발굴단은 1970년대 발굴한 월지 서쪽의 대형건물군과 비교해보았다. 차이가 있었다.
우선 공간의 높이가 달랐다. 월지 동편의 대형 건물(해발 50.3m)은 서편의 대형건물(A·해발 52.6m)보다 2.3m 정도 낮았다. 또 칸 수(서편 건물 7×4칸, 동편 건물 5×4칸)도 차이가 났다. 인공 연못의 규모또한 달랐다. 결국 월지를 기준으로 서쪽은 ‘왕의 공간’이고, 동쪽이 바로 ‘태자(동궁)’의 공간일 가능성이 짙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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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 탈출 프로젝트
또 다른 의문점이 꼬리를 문다. 지금까지 왕성으로 알려진 월성은 어찌되는 건가.
월성에는 ‘왕의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건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사로국 단계를 벗어나 고대국가로 발돋움한 신라에게 월성은 비좁은 궁성이었다. 한강유역을 차지한 553년(진흥왕 14) 신라는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지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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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새 궁궐터에서 황룡이 나타나는 바람에 사찰(황룡사)로 바꿔 조성했다”(<삼국사기>)고 기록이 눈에 밟힌다. 연구자들은 새 궁궐터가 습지로 확인되면서 긴흥왕이 공사를 포기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렇게 새 도성 건설이 무산된 상황에서 삼국통일까지 이뤄냈으니 어찌 되었겠는가.
사로국 시대의 산물인 월성은 이제 통일신라의 도읍으로는 격에 맞지 않는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무왕이 674년과 679년 연못을 조성하고, 궁궐과 동궁을 중수 및 창건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의미심장하다. 문무왕은 월성에서 나와 태자와 함께 새롭게 중수·조성한 ‘궁성+월지’, 그리고 ‘태자궁(진짜 동궁)+연못’에서 정사를 펼치지 않았을까. 물론 월성의 궁궐도 기능하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동궁과 월지’ 영역은 월지를 기준으로 ‘왕의 공간’(서편)과 ‘태자의 공간’(동편)으로 나뉜 것을 확인했다는 게 발굴단의 잠정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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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된 개 두마리
얼마전 ‘동궁과 월지’ 조사를 포함, 지난 10년간의 신라 왕경 핵심유적 발굴성과를 정리하는 언론공개회가 열렸다.
언론공개회 명칭이 ‘새로 쓰는 신라사’였다. 아닌게 아니라 지난 10년간 월성-동궁과 월지-황룡사터 등의 발굴성과를 정리하면 신라 역사를 어느 정도를 그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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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101년(파사왕 22) 쌓았다”(<삼국사기>)는 월성부터 살펴보자. 발굴결과 월성의 남쪽에서 3세기대 사로국(신라의 원형) 시기 마을 흔적이 확인됐다. 1700~1800년 전 신라인들이 연약지반에 마을을 조성하려고 1.5m에 달하는 성토(흙 쌓아 다져올림) 작업을 벌인 것이다.
이중 눈길을 끄는 의례유구가 보였다. 원형구덩이(지름 6m)가 불에 타 폐기된 채 확인됐다. 그중 개(犬) 두마리를 의례의 제물로 바친 정황도 눈길을 끈다. 마을 조성을 위한 택지 개발을 해놓고 ‘잘 살게 해달라’며 개 등을 희생양으로 바친 의례행위를 펼친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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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제사와 경주 사계
2017년부터 진행된 월성의 서성벽 발굴에서 뜻밖의 결과가 보였다. 성문을 쌓기 위해 단단히 다진 맨바닥층에서 50대 남녀와 10살 전후의 어린아이가 가지런히 누운채 발견된 것이다.
유구의 연대는 4세기 중엽으로 추정됐다. 축성 과정에서 안전을 기원하고, 견고한 성의 완성을 바라면서 사람을 제물로 삼은 것이 틀림없었다. 사람제사(인신공희)의 흔적이 분명했다.
월성 주변에서는 5세기 무렵에 처음 조성된 해자(垓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에 판 물도랑 혹은 연못)가 확인됐다. 그곳에서 퍼낸 25t 덤프트럭 100대분의 점토흙을 물체질까지 해서 걸러내 학제간 연구를 통해 얻어낸 결과는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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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씨앗 및 열매 74종과 규조물(식물성 플랑크톤) 및 꽃가루 등과 해자 구조물을 토대로 월성해자와, 그 주변의 식생과 경관을 계절별로 추정한 것이다. 1600년전 경주의 ‘사계’가 복원된 것이다.
해자에서 축토된 각종 곡물과 채소류, 견과류, 과실류 등과 동물·생선뼈들로 당대 사람들의 식생활도 복원했다. 해자 유물 중 특히 눈에 띄는 유물은 ‘터번을 쓴 토우(흙인형)’이다. 예부터 동서교역에 종사했던 소그드인(페르시아계 유목민) 같았다. 실크로드의 동쪽 끝인 경주까지 동서양 교역이 활발했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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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판 광화문광장
앞서 새 궁궐터로 낙점되었다가 사찰 건설로 돌아선 곳이 있다고 했다. 553~566년 사이 조성된 국찰 ‘황룡사’였다. 643년 선덕여왕(632~647)은 높이 80m에 이르는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다. 1400년 전 경주의 랜드마크가 건립된 것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최근 발굴결과 황룡사 남쪽 바깥에서 초대형 광장이 확인됐다. 규모는 확인된 구간만 길이 280m×폭 50m 정도이다. 이 광장은 최근 발굴된 ‘동궁과 월지’ 중 ‘태자의 공간’으로 추정되는 건물군의 동문과 연결된다. 전체적으로 7000여 평(길이 500m×폭 50m)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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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광장(약 600m×60m)의 규모에 버금간다. 이곳에서 ‘의봉 4년(679년) 당 고종의 연호)’명 기와 등이 확인됐다. 1975~76년 월지에서 출토된 ‘의봉 4년’명 기와와 연대가 같다.
결국 황룡사 앞 광장은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674년~679년 사이 이끌었던 도시확장계획에 따라 ‘월지-궁궐-태자궁(동궁)’ 건설과 함께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등에 국가대사가 있을 때 임금들이 친히 황룡사에 나와 대규모 법회(백고좌회)를 열고, 연등회에도 참석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그 행사장이 ‘황룡사 광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의 왕과 왕·귀족이 ‘동궁과 월지’의 태자궁문(동문)을 통해 황룡사 광장으로 입장했을 것이다. 문무왕 이후 신라왕들이 ‘태자가 차기 왕위를 이을 준비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태자궁을 점검하는 행차를 겸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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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어내야 할 오해
아! 좀 우스갯소리 같지만 이번 기회에 일말의 오해를 풀어야 할 것 같다.
1975년 당시 안압지(월지)에서 출토된 목제 남근과 주령구 관련 이야기다. 목제 남근은 길이 13.5㎝, 17.5㎜ 짜리가 두 점 확인되었다. 연못 바닥에서 확인된 주령구(酒令具)는 6개의 사각형과 8개의 육각형으로 된 ‘14면체 주사위’다. 이 주사위는 질탕한 술자리에서 주사위를 던져 14면에 새겨진 글 대로 벌칙을 받았던 놀이기구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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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판 ‘복불복’ 게임이었다고나 할까. 벌칙 가운데는 ‘원샷으로 술 석잔 마시기(三盞一去·삼잔일거)’, ‘술 잔 비우고 크게 웃기(飮盡大笑·음진대소)’, ‘무반주 댄스(禁聲作舞·금성작무)’, ‘야자타임(有犯空過·유범공과)’, ‘임의로 신청곡 받아 노래부르기(任意請歌·임의청가)’ 등도 있었다.
‘여러 사람이 코때리기(衆人打鼻·중인정비)’, ‘얼굴 간지럼 태워도 참기(弄面孔過·농면공과)’, ‘더러워도 버리지 않기(醜物莫放·추물막방)’ 같은 짓궂은 벌칙도 있었다. 요즘 같으면 ‘직장내 괴롭힘’으로 지탄받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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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지금까지의 인식대로 ‘동궁과 월지’가 오롯이 태자만의 공간이었다면 어떨까. 차기 왕위를 준비하느라 불철주야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야 할 태자의 공간에서 그런 망측스럽고(목제 남근), 질탕한 술판(주령구)을 벌인 증거유물이 나왔으니 어떠했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유물이 나온 연못, 즉 월지가 왕의 공간이라는게 확실하다면 그동안 신라 태자에게 가졌던 오해는 풀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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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의 공간’으로 추정되는 동쪽 공간에서는 아직까지 ‘금박화조도’와 ‘상아 주사위’ 밖에는 나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누가 알까. 후속발굴에서 어떤 유물이 나올지 모르니 단정은 금물이려니….
이것이 신라왕경 10년 발굴을 통해 더듬어본 신라 역사이다. 새삼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덕업이 날로 새로워져 사방을 망라한다)’(<삼국사기> ‘지증왕’조)에서 따온 국호 신라가 떠오른다. 삼국 중 가장 늦게 고대국가의 기틀을 쌓았지만 마침내 ‘삼한일통’을 이룩한 신라가 아닌가.
(이 기사를 위해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이동훈·박성진 연구관, 김경열·김헌석·최문정 학예연구사, 이현태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이민형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조사팀장, 차순철 서라벌문화유산연구원 조사연구단장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lkh0745@naver.com
<참고자료>
김경열, ‘동궁과 월지 고고학적 조사 현황과 앞으로의 과제’, <동아시아의 궁성 체계와 신라 궁성>(학술대회 발표집>, 국립문화유산연구소, 2024
이현태, ‘경주 동궁과 월지’의 성격을 둘러싼 논의와 쟁점‘, <선사와 고대> 제72호, 한국고대학회, 2023
이동주, ‘신라 동궁의 구조와 범위’, <통일신라의 궁원지, 동궁과 월지의 조사와 연구 회고와 전망>(학술대회 발표집), 한국고대사학회·경주문화유산연구소, 2020
이민형, ‘황룡사 남쪽 광장과 도시유적 조사성과’, <황룡사 남쪽광장 정비 및 활용방안>(학술대회 발표문), 경주시, 2020
국가유산청·신라왕경핵심유적복원 정비추진단 등, <국가유산청이 새로 쓰는 신라사 이야기>(신라왕경 핵심유적 발굴조사 10년 성과 공개회 자료집>, 2025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동궁과 월지>(Ⅰ·Ⅱ·Ⅲ), 2012·2014·2019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경주 동궁과 월지 복원정비사업 발굴조사보고서-A건물지>, 2018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못 속에서 찾은 신라-45년 전 안압지 발굴조사 이야기>,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