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 전 세계 휴대폰 시장을 주도했던 노키아의 벨소리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생된 디지털 사운드 중 하나로 꼽힌다. 스페인 작곡가 프란시스코 타레가의 기타곡에서 따온 이 벨소리는 2009년 기준 하루 약 18억 번, 매초 2만 번꼴로 울렸다. 그러나 2007년을 기점으로 음악은 멈추기 시작했다. 애플의 아이폰 등장과 함께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면서 노키아가 급격한 추락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이런 노키아가 최근 다시 테크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160년에 이르는 긴 업력 속에서 반복된 피벗(pivot·사업 전환)을 통해 생존의 DNA를 축적해온 노키아가 인공지능(AI) 투자 확대 흐름의 수혜 기업으로 또 한번의 진화에 나서고 있어서다.
3일(현지 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 등에 따르면 글로벌 테크계는 최근 노키아의 사업 재편과 전략 전환을 주목하고 있다. AI 인프라 투자와 관련해 대규모 투자 유치를 성사시키며 부활의 신호탄을 울렸다는 진단이다.
노키아의 출발점은 1865년 핀란드의 한 제지 공장이었다. 이후 고무 타이어와 케이블 등을 생산하는 기업으로 성장한 노키아는 1990년대 초 휴대폰 사업에 역량을 집중하기로 결정하며 운명을 바꾼다. 선택은 적중했다. 2세대(2G) 이동통신의 국제표준 기술로 불리는 글로벌이동통신시스템(GSM)을 비교적 빠르게 도입하면서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중반 전성기를 맞았다. 실제 노키아는 1998년 미국의 모토로라를 제치고 세계 1위 휴대폰 제조사로 등극했고 2007년 글로벌 휴대폰 시장 점유율은 40%에 달했다. 이에 힘입어 노키아의 시가총액은 약 2600억 달러까지 급증했고 핀란드 전체 수출의 약 20%, 국내총생산(GDP)의 3~4%를 차지할 정도로 국가 경제를 떠받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7년 애플이 아이폰을 출시하며 스마트폰 시대가 본격화되자 노키아의 위상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한 노키아는 기존 성공 모델에 머물렀고 점점 경쟁사에 밀려갔다. 결국 노키아는 2014년 디바이스 부문을 54억 유로에 마이크로소프트(MS)에 매각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휴대폰 사업의 막이 내려진 순간이다. 뉴스트리트리서치의 애널리스트 벤 하우드는 “노키아의 대응은 지나치게 늦었고 안드로이드와 iOS에 맞서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근본적으로 재설계하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이후 노키아는 본격적인 반등 전략을 수립했다. 2014년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라지브 수리는 통신 네트워크 사업을 새로운 승부처로 삼았다. 노키아는 이 과정에서 프랑스 통신장비 업체 알카텔루슨트를 156억 유로에 인수하는 등 대규모 인수합병(M&A)을 통한 사업 재편에 나섰다. 현재 이 부문은 노키아 매출의 약 90%를 차지하는 핵심 축으로 자리 잡았다. 회사의 체질이 기업·소비자간거래(B2C)에서 기업간거래(B2B) 중심으로 전환된 것이다.
하지만 회사는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화웨이와 ZTE 등 중국 업체들이 기술력과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빠르게 부상하며 노키아의 시장점유율을 잠식했다. 핵심 사업이 다시 압박을 받자 노키아는 다시 한번 방향 전환을 선택했다.
2020년 CEO를 맡은 페카 룬드마르크는 노키아의 전략 축을 ‘클라우드 서비스, 데이터센터, 광학 네트워크’로 옮기며 또다시 변화에 나섰다. 바통을 이어받아 지난해 4월 CEO로 취임한 저스틴 호타드는 ‘AI 슈퍼사이클’에 올라타겠다는 전략을 분명히 했다. 노키아의 광학 기술은 데이터센터 간 초고속 데이터 전송을 가능하게 하고 클라우드 서비스를 구동하는 핵심 장비로 꼽힌다. 호타드 CEO는 “노키아는 사람들을 연결하며 세상을 바꿨고 이제는 지능을 연결함으로써 다시 한번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이 전략은 큰 반응을 일으켰다. 지난해 10월 엔비디아가 노키아에 10억 달러(약 1조 4000억 원) 투자를 결정하고 양 사가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하기로 한 것이다. 양 사는 차세대 6세대(6G) 기술을 공동 개발하는 한편 엔비디아가 향후 AI 인프라 계획에 노키아의 기술을 통합하는 방안을 검토한다. 시장에서는 노키아의 새로운 변신을 알리는 변곡점이라는 평가들이 나온다.
이 같은 노키아의 생존 배경을 두고 실패한 사업을 신속히 정리하고 자원을 재배치해온 조직적 판단력이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케임브리지대의 샤즈 안사리 교수는 “기업의 재도약 능력은 실패를 어떻게 다루고 자원을 어떻게 재배치하느냐에 달려 있다”며 “노키아는 사업이 작동하지 않을 때 과감히 정리하고 산업 자체를 전환할 수 있었던 드문 기업”이라고 짚었다. 노키아에 대한 전망도 나쁘지 않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노키아의 내년 매출은 올해보다 약 4%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AI 투자 확대의 수혜 속에 조정 순이익 역시 약 9% 늘어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회사는 2028년까지 현재 20억 유로대인 영업이익을 27억~32억 유로로 늘리겠다는 목표를 제시한 상태다.
다만 경계하는 시선도 적지 않다. AI 네트워크 시장의 변동성이 크다는 지적 때문이다. PP포사이트의 파올로 페스카토레 애널리스트는 “고객들이 단일 공급 업체에 대한 의존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며 “AI 투자가 기대만큼의 수익으로 이어질지는 아직 불확실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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