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의 신분해방 앞장선 강상호 가족

“공평(公平)은 사회의 근본이오 애정(愛情)은 인류의 본심이라.”
저울처럼 공평한 조건 위에서 사람답게 살기를 꿈꾸는 사람들의 운동. 1923년 4월 25일 경남 진주에서는 백정(白丁)의 신분해방을 내건 형평사(衡平社)가 창설되었다. 차별의 최전선에서 갖은 모욕과 멸시를 받던 40만 백정 가족을 사회의 보통 사람으로 편입시키자는 운동이다. 이 형평운동을 주도한 이는 3000석 지기 지주의 아들 강상호(姜相鎬·1887~1957)다. 아버지 강재순이 사재를 풀어 근대 학교를 세우고 청년 교육에 힘을 실었다면 아들 강상호는 더 나아가 신분 차별에 신음하는 동족의 인권에 주목한 것이다. 양반의 신분에 지역 부호로 이름난, 37세의 강상호는 가장 ‘천한 족속’ 백정의 해방에 몸을 던졌다.
3·1운동 옥고 치른 양반가 강상호
불합리에 분개 3000석 재산 헌납
아버지는 교육 운동, 동생은 색동회
재해 구제한 어머니는 ‘시덕불망비’
양반과 백정 힘 합친 형평사 운동
노선 차이로 내홍, 백정이 주도권

조선 500년을 걸어온 백정의 삶은 어떠했는가. 백정이라는 이름은 그 역사가 오래되었는데 고려시대만 해도 농업에 종사하던 자유민이었다. 조선 건국과 함께 백정에 드는 범주가 바뀌어 수렵에 능한 화척(禾尺)과 기예에 능한 재인(才人)을 포괄하여 새롭게 구성되었다. 이는 포수나 광대로 유랑하는 자들을 정착시키고 농민화하기 위한 조선 건국기 정책의 일환이었다. “재인과 화척은 본시 양인이지만 업이 천하고 칭호가 특수하여, 백성들이 별종으로 보고 혼인하기를 꺼리니 백정으로 고쳐서 평민과 어울려 살게 하소서.”(세종 5) “신백정(新白丁)들은 이미 평민이라 군역(軍役)을 부과했으니 그 자제들은 독서를 통해 향학(鄕學)에 나가게 하라.”(세종 14년)
갑오개혁 이후에도 차별 관습 여전
그런데 위로부터의 기획과 달리 백정은 농민으로 정착하지 못하고 우마(牛馬)를 도살하거나 유기(柳器)를 제조하는 직업인으로 특수한 신분층을 만들어갔다. 그들의 법제상 신분은 양인(良人)이지만 실제로는 공사(公私) 노비나 무당·기생과 같은 천민으로 분류되었다. 다만 성(姓)이 없는 다른 천민과 달리 백정은 자기 성(姓)을 가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정은 천민 중의 천민, ‘불가촉천민’으로 취급되었다.
갑오개혁(1894년)으로 신분 질서가 해체되면서 백정도 멸시와 모욕의 역사를 끝내게 되었다. 하지만 ‘천한 종자’라는 오랜 인습과 사회적 인식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전히 그들은 공공 집회에 출입할 수 없었고, 외출 시에는 패랭이를 쓰는 등 옷차림으로 자기 단속을 해야 했다. 이런 관습을 어긴 백정은 마을 사람들에게 감금을 당하거나 매를 맞는 일이 다반사였다.

1905년 진주에 들어선 첫 교회 진주야소교회는 백정과 비백정을 구분하여 예배 장소를 달리했다. 그런데 나중에 부임한 목사가 신분 차이로 예배소를 나누는 것은 부당하다며 동석 예배를 추진하다가 비백정 신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일이 발생했다. 이런 가운데 경제력을 갖춘 백정들이 진주성 밖 집단 거주지에서 시내 중심지로 이주해 오는데, 여기서도 백정 자녀들의 학교 입학은 여전히 거부되었다. 와중에 개를 잡으라는 자신들의 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백정을 때려죽인 비백정 청년들의 만행이 알려졌다. 당시 강상호는 기미년 3·1 만세 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 형무소에 구속되었다가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직후라 민족 내부의 차별과 폭력에 더할 수 없는 비애감이 들었다. 이러한 생활 속의 불합리한 일들이 강상호의 마음을 움직였다.
여기서 강상호와 함께 형평사를 이끈 두 사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강상호의 후배 신현수는 선대가 한약방으로 상당한 재산을 축적한 덕분에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이후 백정의 교육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천석구는 지물 가게를 경영하여 부를 축적했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한 경력으로 백정 문제에 집중했다. 강상호는 백정의 신분해방은 백정 당사자와 사회적 발언권을 가진 양반들이 함께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여겼다. 백정의 후손 장지필과 이웃 주민 이학찬 등을 영입했다. 장지필은 부유한 백정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학교 입학이 거부되어 독학으로 글을 읽으며 소년기를 보냈고,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다니다 3학년으로 중퇴한 엘리트였다. 고국에서 취업을 시도하던 중 자신의 민적부에 ‘도한(屠漢)’으로 기재된 것을 보고 포기하고는 강상호가 이끄는 백정 해방운동에 투신하였다. 이학찬은 도수업(屠獸業)과 수육(獸肉) 판매업으로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고 사숙으로 수학하여 형평사 창립 이후 사원의 복지와 인권 옹호에 힘을 실었다. 이처럼 형평사 결성을 주도한 인물은 진주지역의 양반 지식인들과 경제력을 갖춘 백정들이었다.
반형평운동 일어 충돌사건만 44건

형평사 창설을 계기로 여러 신문은 백정 운동의 취지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백정 부락 사람들의 피눈물 나는 호소로 진주 대안동에 형평운동 본부 마련’이라든가, ‘전국 40만 동족에게 격문을 날려 해방을 절규하는 경남 백정’이라든가, ‘참을 수 없는 모욕과 천대에 맞서 사랑하는 자손을 위해 서로 단결하자’는 등의 내용이었다. 한편 ‘백정놈’을 위한 조직에 반대하기로 결의한 진주 인근 24개 동리의 농청(農廳) 대표들을 비롯해 수백명 군중이 형평사를 공격하기 시작하는데, 이들에게 강상호는 ‘새 백정’으로 불렸다.
신분제가 일소되지 않는 상황에서 백정과의 차별성을 통해 위안과 자기도취적인 만족감을 누리려는 심리가 왜 없겠는가. 형평 운동이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자 반형평운동도 덩달아 일어나며 곳곳에서 최하층민 백정을 공격하는 폭력 사태로 번져갔다. 형평사가 창설된 1923년 4월 이후 2년 동안 언론에 보도된 충돌 사건만 해도 44건에 이르고, 형평사 총본부에 보고된 충돌 사건은 100여 건에 이르렀다.(조규태, 『백촌 강상호』) 이러한 사태는 양반들의 선동과 관공서의 차별, 교육 현장의 차별이 원인이었다. 고무적인 것은 백정을 향한 인습적 공격이 이제는 법에 따라 처벌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가운데 일부 언론은 백정들의 권리 주장에 불만 섞인 주장을 내는데, 조선 인구가 2000만인데 까짓 40만 백정을 위해 굳이 갈등을 만들어내야 되겠냐는 것이다. ‘40만 동족의 분기(奮起)를 촉구하면 나머지 1960만명은 어떻게 되나. 그들의 형평 운동이 도리어 형평을 파괴하는 길로 가는 게 아닌가.’(매일신보, 1923년 5월 2일자) 백정과 비백정, 소수와 다수를 대결로 보고 다수의 편의를 위해 소수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논리다. 100년이라는 세월에도 불구하고 사회통합의 이름으로 양극단의 중간을 주장하거나 대화의 목적을 이해가 아닌 합의에 두는 주장이 여전히 득세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형평운동 반대 세력에 의한 충돌 사건은 일시적으로 운동을 위축시켰지만 형평사원들의 결속력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조직의 속성이기도 한 듯 형평사 운동도 내홍을 겪게 되는데, 백정 출신과 비백정 출신 간의 생각 차이가 발단이었다. 강상호를 비롯한 비백정 출신은 백정의 불평등한 대우를 해소시키는 데 역점을 두고 사원 자녀들의 교육을 중시했다. 반면 장지필을 비롯한 백정 출신은 사원들의 경제력 향상에 주력하며 피혁 공장의 설립과 육류 판매의 주도권을 쟁취하는 것에 주목했다. 이에 강상호는 경제적 이익 신장은 형평사 개개인이 일이지 단체가 개입하면 형평사가 이익 단체에 불과한 것이 되어 사회적 평등이라는 형평사 본연의 임무에서 멀어진다는 생각이었다. 결국 “형평사원(衡平社員)의 자격은 순백정(純白丁)에 한정한다”는 회의 결과에 따라 형평사의 주도권은 장지필에게 돌아갔다. 〈매일신보, 1926년 9월 26일자〉
그 후 뒤에서 형평사의 발전을 지원하던 백촌(白村) 강상호는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기까지 조용하고 평온한 일상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 많던 재산을 사회운동에 아낌없이 헌납하고 빈손으로 고향 정촌 마을로 돌아간 백촌, 채마밭을 가꾸며 작은 생명들과 기쁨을 나누는 옛 혁명가를 상상해보라. 양반 부호 강상호의 나눔과 헌신은 그 부모의 철학과 형제들의 활동을 돌아보게 한다. 먼저 아버지 강재순은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 새로운 시대의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사립봉양학교를 설립하였고, 어머니 전주 이씨는 1917년과 1925년 두 차례 재해로 터전을 잃은 고향에 거금을 내놓으며 삶을 추스르게 했다. 도움을 받은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기억하고자 ‘시덕불망비’를 세우고 그 사연을 새겨넣었다. “무너진 궁벽한 마을, 복전을 내어 농사짓게 해주시고, 마을에 내놓으신 천금으로 많은 집이 살게 되었다. 산 같은 은혜와 바다 같은 덕택이 우뚝하고 너르노니 잊지 않게 돌에 새겨 백세토록 전하리라.”
강상호 장례식 전국에서 인파 몰려
동생 강영호는 동경대에서 문학을 전공하며 방정환과 손진태 등과 함께 어린이 단체 ‘색동회’를 창립했다. 귀국해서는 진주소년운동을 이끌며 문학가로 항일운동가로 활약했다. 막냇동생 강신호는 동경미술학교 서양학과에 진학하여 각종 대회의 입선과 특선을 번갈아 따낸 수재였다. 여름 방학을 맞아 진주에서 개인전을 준비하던 중 남강에서 익사하는 비운을 맞는다. ‘강신호씨는 조선이 낳은 천재, 청년미술가, 반도미술계의 큰 손실.’(매일신보, 1927년 7월 25일자) 각종 언론은 개인 전람회가 추도전람회가 된 것을 안타까워했다.
1957년 11월 16일 백촌 강상호의 고별식장은 전국에서 몰려든 수많은 장례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각지에서 온 형평사원들은 하나같이 삼베 옷에 두건을 쓰고 줄을 지어 선생을 영결했다. 새벼리 묘소로 향하는 장례 행렬은 그 끝을 알 수 없었고, 가을바람에 펄럭이는 수많은 만장은 푸른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백정들의 참다운 세상을 꿈꾸었던 그 참 아름다운 삶이여!”
이숙인 동양철학자·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