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땅에 통신망 인프라 구축…무선통신 1인자로 자리매김”

2024-10-25

마이크로웨이브망 전국 개통

TDX로 1 가구 1 전화 보급

88올림픽 이동통신기술 도약

세계 첫 CDMA 상용화 성공

벽돌폰 → 포켓폰 경량화

3G에서 5G로 초고속 발전

[정보통신신문=성원영기자]

한국의 산업 발전과 함께 통신인프라가 태동한 지 올해로 60년이 됐다. 서울시에서는 이를 기념해 최근 ‘무선통신, 일상을 만들다’ 특별 기획전을 개최했다. 이번 기획전을 살펴보면 한국의 무선통신 산업이 ‘통신사업 5개년계획’, ‘전자식 교환기(TDX) 개발’, ‘88서울올림픽’ 개최와 같은 전환점을 통해 가파르게 성장했다는 걸 알 수 있다.

통신인프라의 시발점

1960년대만 해도 한국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며 자체적인 통신 설비 구축이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1961년 말 인구 100인당 전화보급률은 0.4대였다고 한다.

이 밖에 장거리전화를 위한 물리적 통신 라인은 1777회선, 국제통신은 26회선으로 통신불가능지역도 많았다. 시외통화 대기시간만 약 120분이 걸렸다.

이에 당시 정부는 경제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통신사업 5개년계획’을 수립해 4차례에 걸쳐 통신망 보급과 시설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이 중 특히 통신인프라의 시발점이 된 제1차 통신산업 5개년계획(1962~1966년)을 통해 노후시설 정비개량과 시내전화 증설 등을 진행했다.

1962년 8월, 광화문전화국은 최신식 서독제 EMD 자동교환기가 설치됐다.

EMD 자동교환기는 전기적 신호와 스위치 장치를 조합해 통화를 연결한다. 일종의 전자식 교환기로, 수동식 교환기가 전자식 교환기로 대체되는 과도기에 나온 획기적인 기술이다. 이를 통해 통화량이 많아도 원활한 소통을 중개할 수 있었다.

이후 1976년 12월 서울, 부산, 대전, 광주, 대구 등 주요 도시를 잇는 마이크로웨이브(microwave)망이 구축됐다.

당시 시외전화를 거는 일은 여전히 대기시간이 길고 어려웠기에 빠른 개발이 필요했다. 하지만 통신을 위해 케이블을 매설하는 작업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한국 특유의 산간 지형으로 인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마이크로웨이브망 개통이었다.

마이크로웨이브망은 고지대에 송·수신 안테나를 설치해 두 안테나 사이의 가시거리가 확보된 상태에서 통신한다. 고지대에 안테나를 설치한 이유는 고주파인 마이크로파(약 1~30㎓)가 직진하는 특성이 있어, 중간에 가로막는 장애물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웨이브망이 전국적으로 구축됨과 더불어, 금산위성센터가 개국해 시외전화의 대기시간이 20분에서 5분으로 대폭 단축됐다.

자동차보다 비싼 전화

80년대부터는 무선통신 기기와 기술이 사람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1984년 당시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통해 본격적으로 대국민 이동통신 서비스가 시작됐다.

이 시기에는 자동차 한 대 값에 맞먹는 통신 기기가 있었는데 바로 ‘카폰’이다. 카폰이란 차량 내부에 설치해 전화 통화를 할 수 있는 차량 전용 무선 전화기를 가리킨다.

우리나라에 카폰이 최초로 도입된 것은 1960년대지만 이때만 해도 소수의 고위공직자에 한해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이후 1984년, 한국이동통신에서 카폰의 청약 접수와 설치를 담당하며 민간에 상용화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카폰을 사용하기 위해선 설비비, 전신 전화 채권 구입 등 부담해야 할 비용이 많았다. 카폰 사용을 위한 총비용을 합치면 대략 400만원 규모였다.

1982년에 출시된 ‘포니 2’의 가격이 347만원인 것과 비교하면 카폰의 가치가 매우 높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오윤정 G밸리산업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당시 자동차 보닛 위에 선 카폰 안테나는 부의 상징이 됐다”며 “이로 인해, 일부 사람들은 차 안에 카폰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과시용으로 보닛 위에 안테나만 설치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했다.

이처럼 당시만 해도 아직 한 집에 전화기 한 대가 있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바꾼 것은1986년에 개발된 전자식 교환기(TDX)다.

TDX는 전통적인 아날로그 방식 대신 디지털 신호를 이용해 전화 연결을 자동으로 처리하는 기술이다.

1976년 2월 열린 경제장관회의에서 ‘전자교환기 도입 타당성 검토’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담당하기로 결정됐다.

같은 해 9월, 정부는 체신부 장관(이경식 전 경제부총리)을 위원장으로 한 전자통신개발추진위원회(TDTF)를 구성하고, 전자교환기 도입을 결정했다. 12월엔 아날로그 전자교환기 국산화를 비롯한 디지털전자교환기술 국내 개발계획을 최종 확정했다.

기술 개발을 위한 전담 조직인 KIST 부설 한국전자통신연구소(현 ETRI)가 설립된 해도 1976년이다.

1979년 10·26사태 이후 혼란스러운 국내 정세 속에서 전자교환기 개발 의지가 뒷전으로 밀리나 싶었지만 1981년 8월 제5차 경제사회발전5개년 계획으로 다시 급부상했다.

체신부는 먼저 교환기개발 사업을 국가전략사업으로 선정해, 체신부와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가 함께 추진하기로 했다. 국가 연구기관인 한국전자통신연구소가 구심점이 돼 생산업체와 공동으로 개발을 추진했다.

또한 삼성반도체, 금성반도체, 대우통신, 동양전자통신 등 산업체가 참가한 협업시스템을 구성했으며 전자교환기 개발에만 240억원을 투입했다.

당시 큰 공장을 하나 세우는 데 약 50억원의 예산이 필요했던 것과 비교하면 이 사업이 얼마나 막대한 규모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때문에 정치권과 시민단체 등에서는 TDX 개발에 부정적인 의견을 표출했다.

그럼에도 공동개발연구팀은 끝까지 연구를 이어갔다. 1983년 12월 경기도 용인군 송전우체국에서 500회선 규모의 전자교환기를 대상으로 시험운용을 진행했으며, 1986년 3월 세계 최초로 TDX 상용화에 성공했다.

전자교환기 국산화는 이후 한국의 무선통신 기술 발전의 중요한 초석이 됐다고 평가받는다.

88서울올림픽, 또 하나의 전환점

한국은 1988년 개최된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이동·방송 통신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당시 올림픽을 위해 전 세계에서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을 찾았다. 올림픽 기간 동안 300만명에 가까운 관람객이 방문했다.

서울올림픽에서는 특히 국제 TV 방송 수요가 중요했기에 지상 위성지구국을 신설하고, 인텔샛(INTELSAT)과 협력 관계를 맺었다. 인텔셋은 114개국이 가입하고 있는 국제기구로 위성을 통해 세계 165개국을 연결하는 국제 위성통신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한, 당시 여의도에는 88서울올림픽의 방송을 주관하는 기구인 국제방송센터(IBC)가 세워져 각종 특수 방송시설들이 마련돼 올림픽 경기를 전 세계에 방송했다.

서울역사박물관에 따르면,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국내 TV·비디오테이프레코더(VTR) 시장이 성장해 1981년 가구당 TV 보급률은 1981년 0.18%에서 1989년 1.04%로 크게 상승했다고 한다.

안보를 이유로 제약받았던 이동통신 분야도 호황을 맞았다. 1990년 말에는 이동전화 가입자 수가 8만명에 도달했다. 하지만 통화 중 단절·혼선 등 아날로그 시스템의 한계가 드러났다.

디지털 이동통신 시스템 개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파수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접속방식이다. 당시, 코드분할방식인 CDMA가 차세대 이동통신 기술로 주목받았다.

1992년 미국 퀄컴사가 개발한 CDMA 이동전화실험시스템을 접한 ETRI는 퀄컴사와 기술 공동개발을 결정했다.

개발을 시작한 지 3년 만인 1996년 세계 최초로 CDMA 개발 상용화에 성공했다.

이 때를 계기로 국내 IT 내수 시장이 커졌으며, 더 이상 해외에 의존하지 않고 국내에서 휴대전화를 제작하고 개통할 수 있는 국가로 성장했다. 또한, 반도체 기술도 함께 발전하면서 무게가 1㎏ 육박하던 ‘벽돌폰’이 주머니 속으로 들어올 만큼 경량화됐다.

2000년대부터 현재까지 이동통신 기술은 초고속을 목표로 3G에서 5G까지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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