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부가 ‘이달(8월)의 독립운동’으로 일장기 말소(抹消) 사건을 선정했다. 이는 일제강점기인 1936년 8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하계 올림픽과 관련이 있다. 한국이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이던 시절이다. 당시 마라톤에서 우승한 23세의 손기정(1912∼2002) 선수는 한국이 아닌 일본 국적 선수로 출전했다. 금메달을 따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선 그가 입은 운동복 가슴에는 일본 국기 일장기가 새겨져 있었다.
동아일보 등 국내 몇몇 언론이 이를 보도하며 손 선수 가슴팍에 그려진 일장기를 완전히 삭제한 사진을 지면에 실은 것이 일제 조선총독부 비위를 건드렸다. 동아일보에 무기한 정간 처분이 내려진 것을 비롯해 숱한 탄압이 뒤따랐다. 보훈부는 “일제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 의지를 표출한 언론인들의 목소리”라고 평가했다.

손기정 선생은 73세이던 1986년 8월 이 사건에 대한 안타까운 심경을 동아일보에 밝힌 바 있다.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 수상 50주년을 기념한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손 선생은 “시상식이 거행되는 동안 일본 국가가 연주되면서 일장기가 게양되자 나라 없는 설움으로 가슴이 미어질 듯했다”고 술회했다. “가슴 오른쪽 아래 일장기를 뜯어내고 ‘나는 조선 사람’이라고 외치고 싶은 충동도 느꼈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고도 했다. 혹자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는 힐난을 퍼부을 지도 모르겠다. 일제강점기를 직접 겪지 않은 후손이 함부로 내던질 말은 아니라고 하겠다.
연덕춘(1916∼2004) 선생은 흔히 ‘골프계의 손기정’으로 불린다. 일제강점기인 1941년 일본 프로골프 최고 권위의 대회인 일본 오픈에서 한국인 최초로 국제대회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 일본 골프사에서 ‘연덕춘’이란 이름은 오랫동안 잊힌 존재였다.
당시 그가 ‘노부하라 도쿠하루’(延原德春)라는 일본식 성명으로 출전했기 때문이다. 한국프로골프협회(KPGA)와 대한골프협회(KGA)는 올해 광복 80주년 그리고 한·일 수교 60주년을 앞두고 지난해부터 일본골프협회(JGA)를 상대로 연 선생의 국적과 이름 수정을 강력히 요청했다. 최근 이 주장이 받아들여져 1941년 일본 오픈 우승자의 국적이 한국, 이름은 연덕춘으로 각각 바뀌었으니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기테이 손’(Kitei Son).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영문 홈페이지의 역대 마라톤 우승자 명단에 게시된 손기정 선생의 성명이다. 기테이는 한자 ‘기정’(基禎)의 일본식 발음이다. 같은 대회에서 동메달을 딴 남승룡(1912∼2001) 선생은 ‘쇼류 난’(Shoryu Nan)으로 기재돼 있다. 과거 대한체육회는 IOC에 “손기정·남승룡의 국적을 일본에서 한국으로 고쳐 달라”고 요구했으나, IOC는 “올림픽 개최 당시의 역사를 훼손해선 안 된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했다고 한다. 시상식 때 ‘나는 조선 사람’이라고 외치고 싶었다는 손 선생의 토로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다. 연덕춘 선생에 이어 이제는 손 선생 차례다. 늦었지만 ‘기테이 손’이란 가짜 대신 진짜 이름을 되찾아주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길 촉구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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