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적사 항공기 3대 중 1대가량이 전력 공급 중단(셧다운) 시에도 블랙박스를 작동케 하는 ‘대체동력원(RIPS)’을 갖추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토교통부는 신규 국적기에 한해 RIPS 장착을 의무화하겠다고 밝혀 12·29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에서 발생한 ‘4분7초’의 블랙박스 공백이 기존 항공기에서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국토부는 지난 13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앞으로 국적사가 새로 들여오는 항공기에 대해 제작연도와 관계없이 RIPS 장착을 의무화하겠다고 밝혔다.
흔히 쓰이는 블랙박스라는 표현은 조종실 음성기록장치(CVR)와 비행자료기록장치(FDR)를 통칭한다. RIPS는 이 중 하나인 CVR에 셧다운 시 10분 내외의 동력을 제공하는 장치다. 지난해 12월 참사가 발생한 제주항공 항공기에는 RIPS가 없어 충돌 전 4분7초의 조종실 음성이 기록되지 않았다. 현행법은 2018년 이후 제작된 항공기부터 RIPS 장착을 의무화하고 있는데 해당 항공기는 2009년에 제작됐기 때문이다.
국토부는 이런 이유로 ‘제작연도와 관계없는’ RIPS 장착 의무화를 추진하고 있으나 의무화 대상에 기존 항공기가 빠져 있어 대책에 한계가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국회 국방위원회·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특별위원회 소속인 백선희 조국혁신당 의원이 국토부에서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지난달 초 기준 전체 국적기 413대 중 145대(35%)가 여전히 RIPS를 장착하지 않은 것으로 집계됐다. 이들 국적기에서 셧다운이 발생하면 또다시 블랙박스가 ‘먹통’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국토부는 신규 항공기에만 RIPS 도입을 의무화하겠다는 것이다.
국토부는 다른 보조동력장치(APU)가 있거나 엔진 정지 가능성이 낮은 항공기를 제외하면 145대 중 91대에만 RIPS 장착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여전히 전체 국적기의 22%가 블랙박스 먹통 사각지대에 남게 된다.

국토부는 기존 항공기를 포함한 모든 항공기에 RIPS 장착을 의무화하는 방안을 이미 고려한 바 있다. 지난달 19일 국토부가 백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를 보면, 국토부는 신규 도입기에만 RIPS 장착을 의무화하는 1안과 함께 기존 항공기도 모두 RIPS를 장착하게끔 하는 2안을 검토했다.
국토부는 1안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비용과 시간 문제 등을 들었다. 국토부는 RIPS 장착에 드는 수억원의 비용, 제작사 기술검토와 자재도입을 위한 시간, 국적기 79.4%가 임차기라는 점 등을 들어 일률적 의무 부과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정치권에서는 비용 문제보다 철저한 기록 보존의 중요성이 앞선다는 주장이 나온다. 백 의원이 대표발의한 항공안전법 개정안은 RIPS 설치·구축을 일률적으로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조처를 하지 않은 항공운송사업자에 대해서는 국토부 장관이 운항증명을 취소하거나 6개월 내 운항정지를 명할 수 있도록 했다.
백 의원은 “항공사고 조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한 블랙박스 기록을 확보하는 것인데 이번 12·29 참사처럼 데이터가 유실된다면 사고 원인 규명이 어려워지고 재발 방지도 힘들어진다”며 “이번 개정안을 통해 철저한 기록 보존 대책을 마련해 항공안전 수준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