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웨이터 “손님 긁어라”…총독부 관료보다 떼돈 벌었다

2025-11-30

모던 경성, 웨이터 50년

사람 마음을 산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어렵습니다. 일제강점기, 한국인 1세대 양식당 웨이터였던 이중일씨 역시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을 고민했습니다. 그 당시에도 손님의 마음을 읽어내는 웨이터들은 팁을 월급의 두 배로 더 받았다고 하네요. 이중일씨 선배는 “손님의 가려운 데를 긁어줄 줄 알아야 한다”며 팁으로 받은 돈을 “영화나 보러 가라”며 후배들에게 주며 인심을 얻었다고 합니다.

국권을 빼앗긴 한반도엔 일본이 세운 철도 위로 철마가 만주땅까지 달려갔죠. 그 기차에 탄 인물은 이토 히로부미부터 일본 왕족과 귀족까지 다양했다고 합니다. 그들에 얽힌 이야기, 이번 호에서 이중일씨의 생생 증언으로 들어보시죠.

보너스도 마련했어요. 옛 중국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군인 장쭤린의 용인술 이야기입니다. 군수 물자를 사라고 돈을 들려 보낸 부하가 “도박으로 탕진했다”고 이실직고하자 장쭤린은 뭐라고 했을까요? 허를 찌르는 한마디를 합니다. 역시 호걸은 다르더군요. 함께 읽어보시지요.

사실 확인을 위해 다양한 관련 서적과 사료를 참고했습니다. 보완해 추가한 내용은 파란색으로 표시했습니다. 참고문헌 목록은 기사 끝에 적시했습니다.

그 옛날, 무성영화 변사의 목소리처럼 AI로 생성한 오디오로도 기사를 ‘들으실’ 수 있어요. 기사 중간에 있는 오디오 버튼을 살짝 눌러주세요. 이중일씨의 이야기는 매주 월요일 찾아옵니다.

모던 경성 웨이터 50년⑨ 팁 찾아 칙칙폭폭 삼만리

중앙일보 1971년 3월 7일자

당대 최고의 식당인 경성역 그릴이 기차역에 있었다는 건 그 시대상의 반영이었다. 기차역이 최고의 핫 플레이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당시엔 철도가 교통의 중추를 이뤘다. 관광이나 호텔업이 모두 철도와 직결되어 있던 때였다. 열차식당과 철도 호텔은 모두 귀빈으로 메워졌고, 웨이터 입장에서 보면 팁도 두둑하게 나오던 시절이다.

나도 경성역 그릴에 근무한 인연으로 열차 식당을 타서 웨이터로 일을 하게 됐다.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 맛에 열차 식당은 당시 ‘쿠크’나 웨이터들에겐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나라를 잃은 설움을 잊었다는 건 아니다. 다만 당시로선 최신 문물인 기차를 타고, 조선땅을 가로지르는 그 경험이 새로웠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엔 경의선을 탔는데, 중국 만주에 들어가서 베이징까지 들러 구경을 할 수 있는 것이 큰 행락이었다.

일본 귀족을 위한 특별 열차도 따로 운행되곤 했고, 만주를 요리하겠다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신의주 철도 호텔에 자주 묵었고 자연히 열차를 많이 이용했다. 이 특별 열차에 타는 것은 또 다른 경험이었다. 한번은 귀족을 위한 특별 열차에 탑승을 하게 되었는데, 부산에서 출발해 신의주로 향하는 여정이었다.

시발역인 부산에서 부산 철도국이 운영하던 호텔에서 벌어진 만찬회는 으리으리했다. 일본 황족이나 군사령관의 특별 열차를 타려면 신분조사도 갑절로 까다로웠다.

일단 탑승을 하면 내실이든 어디든 드나들며 서비스를 했다. 우리나라 철도엔 당시 약 400명의 웨이터가 있었다. 그중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인물이 하나 있다. 장용욱이라는 거물 웨이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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