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러, 2차대전 승리 누가 더 기여했나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2025-05-08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 독일 총통이 1945년 4월30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루 뒤인 5월1일 베를린은 소련(현 러시아) 군대에 의해 함락됐다. 진작 국력이 소진한 나치 독일은 미국·영국·소련 등 연합국의 공세 앞에 더는 버틸 수 없었다. 히틀러 자살 후 꼭 1주일 만인 1945년 5월7일 독일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있던 프랑스 북부 도시 랭스에서 항복 문서 조인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미국, 영국, 자유 프랑스는 물론 소련 측 장교도 참석했다. 훗날 패전국 독일을 분할 점령한 4개국 대표가 함께한 것이다.

보고를 받은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불같이 노했다. 나치 독일 제압에 가장 크게 기여한 나라가 어딘인가. 스탈린은 단연코 소련이라고 여겼다. 2차대전 기간 독일군에 의해 희생된 소련인은 군인과 민간인을 더해 2200만∼2500만명으로 추산된다. 더욱이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독일 수도 베를린을 점령한 국가도 소련이었다.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1945년 5월8일 오후 베를린에 설치된 소련군 사령부에서 항복 문서 조인식이 다시 열렸다. 베를린과 모스크바 간 시차 때문에 미국과 서유럽에선 5월8일이, 소련에선 하루 뒤인 5월9일이 각각 독일을 상대로 최종 승리를 거둔 날로 기록됐다.

연합국의 대(對)독일 전승절은 유럽에서 2차대전을 끝냈다는 의미에서 ‘V-E 데이’(Victory in Europe Day)로 불린다. 소련 시절은 물론 러시아에서 매년 5월9일은 가장 중요한 국가적 기념일이다. 더욱이 올해는 2차대전 승전 80주년이니 더욱 의미가 크다. 러시아는 오는 9일 제80주년 전승절을 맞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성대한 열병식을 개최한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비롯해 해외 29개국 정상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나란히 붉은광장에 서서 열병식을 참관할 예정이다. 푸틴은 이번 행사를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서도 이겼다’는 점을 국제사회에 선전하는 무대로 활용할 심산인 듯하다.

러시아와 달리 매년 5월8일을 전승절로 기리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7일 성명을 발표했다. 트럼프는 성명에서 “나치 독일과의 싸움에서 25만명 넘는 미국인이 목숨을 잃었다”며 “미군의 희생이 없었다면 이 전쟁은 이길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유럽의 2차대전을 끝내는 데 소련보다 미국의 기여도가 훨씬 더 크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전사자 수만 놓고 보면 소련과 미국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2차대전 기간 미국이 소련에 그야말로 엄청난 양의 무기를 제공했고, 이것이 소련의 승리를 견인했다는 점에서 트럼프가 틀렸다고 말하긴 어렵다. 2차대전 당시 반(反)파시즘의 기치를 내걸고 한때 뭉쳤던 러시아와 미국 등 연합국들이 지금은 두 진영으로 나뉘어 원수처럼 서로 으르렁거리는 현실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