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트리거60' ㊶ 포항제철, 쇳물의 기적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해 독일로, 미국을 거쳐 다시 일본으로’-.
세계 철강산업의 주도권은 이렇게 흘렀다. 국가별 산업경쟁력의 변화와도 일치한다. 이쯤이면 철강을 ‘산업의 쌀’이 아니라 ‘산업의 성장판’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일본 다음으론 포스코를 앞세운 한국이 떠올랐다. “실패하면 모두 우향우해서 영일만에 빠져 죽자”는, 이른바 ‘우향우 정신’으로 시작한 포스코는 국내 자동차·기계·조선·건설에서 방위산업·에너지·전자 분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고기능 철강 제품을 공급해 대한민국이 제조 강국으로 우뚝 서는 역사를 만들었다.

대한민국이 철강산업의 중요성에 눈 뜬 것은 정부수립 직후였다. 1949~53년 실행하려던 ‘산업부흥 5개년 계획’에 철강을 비롯, 건설·전력·교통 부문 등에 집중 투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부흥 계획은 전쟁으로 차질을 빚었으나 철강이 중요하다는 인식은 전쟁으로 인해 더 높아졌다. 6·25 후에는 폐허에서 나온 전쟁 고철을 녹여 산업 소재로 썼다. 그러나 소규모였고, 전쟁 고철은 점점 고갈됐다.
61년 3월 상공부는 철강종합개발계획을 다시 세웠다. 5·16 정변으로 들어선 군사정부도 이를 이어받아 철강산업을 일으킬 차관 도입을 모색했다. 64년 말, 박정희 대통령이 광부와 간호사들을 만났던 서독 방문에는 철강산업 등을 위해 차관을 얻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바로 그때 서독 철강업체에서 일하던 김재관 박사가 ‘한국 철강공업 육성 방안’을 전달했다. 육성 방안에는 ‘100만t 규모 일관제철소(용어설명 참조)가 필요하다’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이 보고서는 실제 포항종합제철 건설의 밑그림이 됐다. 포철 1기 설비 규모가 103만t이었다.
박정희, “나는 고속도로, 박태준은 제철소”

서독에 다녀온 이듬해 6월, 박정희가 박태준 당시 대한중석 사장을 청와대로 불렀다. “나는 경부고속도로를 직접 감독하겠다. 임자는 종합제철소를 맡아라. 고속도로가 되고 제철소가 되는 그 날에는 우리도 공업국가의 꿈을 실현하게 되는 거다.”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돈이 필요했다. 제철소 건설 자금이 없었다. 해외에서 차관을 얻을 요량으로 66년 미국·서독·이탈리아·영국 업체가 참여한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을 구성했다. 그러나 세계은행(WB)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WB와 IBRD는 “한국에 종합제철소를 건설하는 것은 경제적 타당성이 낮다”고 평가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돌파구를 찾았다. 미국에서 KISA로부터 최종 퇴짜를 맞고 돌아오는 길, 박태준이 아이디어를 냈다. 대일청구권자금을 활용하자는, 소위 ‘하와이 구상’이었다. 간단치는 않았다. 자금을 어디에 쓸지, 이미 일본과 협의를 마친 상태였다. 이걸 바꿔야 했다. 일본을 설득한 끝에 결국 해냈다.
대일청구권자금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포항제철 임직원들에게 묘한 부채의식을 안겼다. 70년 4월 1일 포항 1기 설비 착공식에서 박태준은 임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포항종합제철은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을 걸고 일해야 한다. 실패하면 모두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 제철보국! 이제부터 이 말은 우리의 인생 철학이 되어야 한다.”
기술은 비교적 무난하게 해결됐다. 자국 내 신규 철강 설비투자 수요가 없다고 판단한 일본이 설비를 한국에 판매하며 기술을 지원했다.

제철소 건설은 전투 치르듯 밤낮없이 진행됐다. 박정희는 박태준에게 이른바 ‘종이 마패’를 주며 건설을 뒷받침했다. 필요하면 포항제철 마음대로 수의계약을 해도 좋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실제 종이 마패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박정희의 신뢰와 박태준의 책임감을 짐작게 한다.

포항 1기 고로는 73년 6월 9일 첫 쇳물을 뿜어냈다. 3년간 연인원 810만 명, 그리고 경부고속도로 건설비(429억원)의 세 배 가까운 1136억원을 들인 결과였다. 강철 생산 1t당 제철소 건설 단가는 비슷한 시기에 지은 일본·대만의 시설에 비해 40%밖에 되지 않았다. 완공하기도 전에 선박용 강재인 중후판 공장을 우선 가동해 당시 현대중공업이 처음 해외에서 수주한 초대형 유조선을 성공적으로 건조할 수 있도록 했다.
포항제철 2~3기 공사 때는 설비와 기술 도입선을 유럽으로 다변화해 신기술을 우리 것으로 만들었다. 이어 바다 위에 건설한 광양제철소는 최첨단 기술과 설비로 최단기간 완공이라는 기록을 세우면서 ‘꿈의 제철소’라 불리게 됐다.
80년대 포항제철은 수입했을 때보다 평균 30% 싸게 철강 제품을 국내 업체에 공급해 산업 경쟁력을 높였다(‘포항종합제철의 국민경제 기여 및 기업문화 연구’,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소). 이뿐이 아니다. 정부는 포항제철소 건설을 통해 대규모 자금 조달과 프로젝트 지원 방안에 이르기까지 노하우와 자신감을 얻었다. 건설 과정에서 축적한 경험은 이후 석유화학, 발전소, 산업용 플랜트 건설 역량을 높이는 기반이 됐다는 분석도 있다. 포항종합제철소 건설은 한국 중화학공업 전반의 트리거였던 셈이다.
포스코는 이어 효율을 높이고 오염물질은 줄인 ‘파이넥스 공법’을 세계 최초로 적용해 철강 기술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등 으뜸가는 글로벌 철강사 자리에 올랐다. 포스코는 2024년 기준 생산 규모는 세계 8위지만 경쟁력은 최고다. 글로벌 철강 전문 분석기관인 ‘월드 스틸 다이내믹스(World Steel Dynamics·WSD)’가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철강 기업’에 2010년부터 15년 연속 1위를 차지했고, 올 6월 글로벌 철강기업으로는 처음으로 WSD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초·중·고·포스텍 세워 ‘교육보국’
‘제철보국’과 더불어 포스코가 추진 한 게 또 하나 있다. 70년 가을, 포스코에 6000만원이 들어왔다. 설비를 도입할 때 사고에 대비해 보험을 들었더니 보험사에서 리베이트가 온 것이었다. 박태준은 바로 박정희에게 보고했다. 돌아온 답은 “마음대로 써라”였다. 그 돈으로 박태준은 ‘재단법인 제철장학회’를 만들었다. ‘교육보국’의 첫걸음이었다. 장학재단을 교육재단으로 바꾸고 유치원과 초·중·고를 세웠다. 그리고 86년 포항공대(현 포스텍)를 설립함으로써 화룡점정했다.

포스코는 세계 최고 경쟁력을 가진 철강사가 됐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영국에서 시작해 일본·한국으로 이어진 철강산업 주도권을 이젠 중국이 이어받을 태세다. 이미 중국은 세계 철강 생산량의 50%를 차지하고 있다. 아세안에서도 설비 신설이 이어져 글로벌 공급 과잉 압력이 높다. 철강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보호무역주의 물결도 거세다. 미국에 이어 유럽연합도 철강 관세를 50%로 높였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탄소 규제 또한 온실가스를 많이 내뿜는 철강 산업에는 거친 도전이다.
그렇지만 이런 대전환은 새로운 기회의 창을 열어놓기도 한다. 우선은 철강과 연관된 전·후방 산업과의 협력을 통한 혁신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에너지 분야에서 수소 인프라를, 조선 쪽에서는 친환경 암모니아 추진선을 빨리 개발해 여기에 필요한 강재를 국내 철강사가 공급하는 식이다. 이러면 다른 나라에서 수소 인프라 등을 지을 때도 우리 강재를 쓰게 마련이다. 처음 검증된 재료를 계속 사용하는 ‘고착 효과(lock-in effect)’다.
포스코가 파이넥스를 기반으로 개발 중인 ‘하이렉스(HyREX)’ 기술 또한 주목거리다. 수소를 이용해 철광석에서 산소를 빼내는(환원) 것으로, 온실가스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혁신적인 공정 기술이다. 70년대 해외 자본과 기술, 설비 도입에 의존해 출발한 포스코가 하이렉스를 상용화해 세계시장에 기술을 수출하게 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신화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일관제철소=철광석에서 쇳물을 만들고(제선), 쇳물에서 불순물을 없애고(제강), 최종 철강제품까지 만드는 과정(압연)을 한 곳에서 모두 처리하는 제철소. 포스코의 포항·광양 제철소와 현대제철의 당진제철소가 이런 일관제철소다.
창간 60주년 기획 '대한민국 트리거 60'은 아래 링크를 통해 전체 시리즈를 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은 ‘성수대교 붕괴와 재난사회’ 편입니다.

정은미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