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 좀 관둡시다

2024-10-20

일반에 공개된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판결문을 펼치면 수천 개의 알파벳에 질식하고 만다. “DI는 DA 계좌 외에도 P, FA, O, ER, CH 각 계좌로 K 주식을 보유하였고…” 같은 숨막히는 암호문이 수백 쪽 넘게 이어진다. 의미가 궁금하실 분들을 위해 통역하면 “김건희는 신한투자증권 계좌 외에도 DS투자증권, DB금융투자, 한화투자증권, 대신증권, 미래에셋증권 각 계좌로 도이치모터스 주식을 보유했다”는 내용이다.

최근 화제의 사건이라 도이치모터스를 예로 들었지만, 사실 ‘익명 판결문’과의 사투는 사회부 기자들에게 일상이다. 등장인물만 수십~수백 명에 이르는 복잡한 사건이라면 A, B, C를 넘어 AA, AB, AC가 누구/무엇/어디인지, 1심의 C가 2심의 A인지 등 단순한 팩트 확인에만 숱한 밤을 보내야 한다. 어렵게 실명 판결문을 구하면 체감상 사건 이해에 드는 노동력이 90%는 격감한다. 자연히 일반 국민들이 접하는 판결문도 같은 상황이다.

놀라운 것은 변호사나 연구원들마저 이런 익명과의 사투를 벌인다는 점이다. 실명 판결문을 턱턱 받아볼 것만 같은 변호사들도 “기자님 OO사건 판결문 갖고 계시냐” 묻고,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은 “범죄 예방책을 연구하는데 판결문 협조가 안 돼 가해자와 피해자를 도저히 분석할 수 없다”고 토로한다.

‘사건 당사자들의 사생활 보호’라는 법원의 취지는 이해한다. 하지만 언론 보도로 만인주지의 사안이 된 공인의 이름까지도 고유명사면 일단 가리고 보는 관례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비실명 처리 기준 역시 담당자마다 제각각이라 범행·소송 관련 지역, 성별, 직업 등 통계적·역사적 가치가 큰 정보가 자주 사라지곤 한다. 다른 대륙법계 국가들과 비교해도 과한 편이다. 이마저도 법원이 제공 중인 전체 판결의 약 30%에 국한된 이야기다. 더구나 유료 공개다(건당 1000원). ‘재판과 판결은 공개한다’는 헌법 109조가 무색하다.

비단 법원만의 문제도 아니다. 최근 검찰을 흔든 ‘도이치모터스 거짓 브리핑’ 논란도 본질은 정보비대칭에 있다. 검찰은 지난 17일 김 여사 무혐의 처분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코바나컨텐츠 관련 압수수색 영장이 기각된 것을 “코바나 사건과 도이치 사건 영장 기각”으로 혼동하는 말실수를 했는데, 다음날 국회 국정감사를 거치며 ‘검찰의 거짓말’ 논란으로 비화했다. 거짓말할 의도까지야 없었겠지만, 국감에 가서야 제출한 영장 내역 자료를 미리 공개했다면 나오지 않았을 잡음이다.

불신은 가리면 가릴수록 커진다. 전달 과정에서 오해도 생긴다. 사법은 사회적 갈등의 종착지다. 당사자가 아니어도, 법조인이 아니어도 사회 구성원이라면 알 권리가 충분하다. 법원·검찰이 “우릴 믿어달라”고 하고 싶다면 쥐고 있는 자료들의 투명한 공개가 선결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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