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타운을 중심으로 한 세계
킨타강 굽이에 세워진 이포 구도시에는 멋진 관청과 은행 및 상가 건물들이 있었다. 기차역이 있고, 성공회 교당, 영국인 클럽, 크리켓과 럭비 등 운동경기를 하는 파당(padang)과 작은 상점가 몇 개가 있었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남자학교 두 개, 가톨릭의 성미카엘학원과 감리교 영-중 학교가 있었고 중국인 소학교 두 개가 있었다.
강 건너 우리 쪽 신도시에는 중국인 가게가 많았다. 종합병원과 다섯 개 큰 학교가 있었다. 주 정부에서 세운 앤더슨학교, 가톨릭 수녀원학교, 영어로 가르치는 영-중 여학교, 그리고 중국계 학교로 육초이중학(育才中學)과 페락여중(霹靂女中)이다. 인근 마을에는 말레이 소학교들이 있었다. 신도시에는 또한 강변의 신시장과 영화관 대부분이 있었고, 동쪽과 남쪽 주석광산과 고무농장으로 향하는 길가에는 웅장한 중국인 저택 몇 채가 있었다. 종합병원 가까이 수녀원 뒤쪽의 관청가는 그린타운으로 불렸다. 1931년에서 1941년까지, 그리고 1946년 초에서 1947년 여름까지 우리 가족이 살던 곳이다.
우리 가족은 그린타운에서 특이한 존재였다. 아버지는 네덜란드 세력권에서 온 체류자이며 교육자로서 유일한 중국 대학 졸업자였다. 중국인학교 일을 하면서 중국 표준어와 영어만 쓰고 말레이어나 어느 중국 방언도 쓰지 못하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린타운은 비-유럽인 공무원들을 전적으로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동네였다. 우리 집 주변에는 말레이인, 중국인, 유라시아인, 그리고 실론과 영령 인도에서 온 사람들이 섞여 살았다. 여러 행정부서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중국인 중에 표준어를 쓰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에게 할당된 집은 조그만 공공주택으로, 말레이 시골집처럼 낮은 기둥 위에 짓고 흑백으로 칠한 집이었다. 침실 두 개에 거실 하나와 욕실이 딸려 있었다. 뒤쪽에는 10미터 길이의 복도와 담장을 두른 마당이 있었다. 복도 끝에는 부엌이 있고 하인방과 작은 창고가 붙어 있었다. 우리는 식사를 그 복도에서 했다.
줄지어 심은 수선화로 둘러싸인 널찍한 정원이 있었다. 코코넛 세 그루와 과일나무 네 그루가 있었다. 람부탄 두 그루, 망고스틴 한 그루, 그리고 두리안 한 그루. 람부탄 한 그루는 아주 크고 높아서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기어오르기를 내가 무척 좋아했다. 철이 바뀔 때마다 과일이 열렸는데, 두리안은 먹어볼 기회가 없었다. 밤중에 익어서 떨어지면 “툭” 소리를 들은 이웃이 가져갔다. 그럴 때 잠이 깨어 발자국소리를 들을 때도 있었다. 날이 밝을 때는 땅 위에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여기서 중국의 그림자를 또 한 차례 느낀 일이 있다. 어머니는 열대과일이 몸에 안 좋은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계셨다. 내가 자라는 동안 먹지 못하게 하셨다. 그런데 람부탄과 망고스틴을 몰래 먹어보니 너무나 맛있는 것이었다. 먹어서 맛만 좋고 아무 탈이 없는 것을 보며 어머니가 언제나 옳으시다는 내 믿음에 처음으로 의혹이 싹텄다.
다섯 살 때 맥스웰학교에 보내기로 아버지가 결정하셨다. 그분이 일하던 교육청 옆에 있는 조그만 사립 영어 학교였다. 중국어는 집에서 가르치면 되니까 괜찮을 거라고 어머니를 안심시키셨다. 아버지는 영문학을 무척 좋아해서 영어를 너무 늦게 배운 것을 아쉬워하셨다. 이 유용한 언어를 아들이 일찍 익히기 시작할 좋은 기회라고 그분은 생각하셨다.
아버지의 상사인 우 선생을 비롯해 중국계 교육에 종사하는 친구들 모두 자녀를 중국인학교에 보냈다. 어머니도 반대하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확신을 가지고 나를 맥스웰학교에 등록시켰다. 학교 다니는 첫 1년 동안 아버지는 출근길에 자전거로 나를 데려다주셨다.
그렇게 해서 나는 두 개 언어를 쓰는 생활을 시작했다. 주변 친지들 중에 나 혼자 영어 학교 다니는 특이한 존재가 되었다. 한편 우리 집이 너무 중국식이라서 나를 별나게 보던 그린타운 아이들의 시각은 누그러졌다. 말레이어 학교를 다니는 몇을 빼고 대부분 영어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었고, 나도 영어를 쓰게 되자 어울려 놀 수 있게 되었다.

맥스웰학교는 다니기 편했다. 아버지가 매일 아침 데려다주었고, 오정에 점심 먹으러 집에 오는 길에 데려오셨다. 그 학교의 기억이 많지 않은데, 프랜시스 선생님은 생각난다. 검은 머리의 푸근한 영국인 여자로 예과 1학년 담임이었다. 알파벳을 가르쳐주고 발음을 바로잡아주고 소리내어 읽기를 시켰다. 내 출생증명서가 네덜란드어로 되어있고 내가 쓸 수 있는 말이 중국어뿐이라는 사실을 유념하고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
그 학교 학생 대부분은 집에서 영어를 썼다. 중국계 학생은 대개 현지 출생의 ‘바바’ 집안이었고 호끼엔과 말레이어를 영어에 섞어서 썼다. 인도계 학생은 실론이나 영령 인도 출신 집안이었고 영어를 잘했다. 유라시안 집안에서는 영어가 첫 번째 언어였다. 말레이 아이들은 사립 이슬람학교나 공립 말레이 소학교에 다녀서 이 학교에 없었다. 학교에서 모두 영어를 썼기 때문에 나도 곧 그 기본을 터득할 수 있었다.
[역주 : 현지 출생 중국계 주민을 ‘바바’라고도 했고 ‘퍼라나칸’이라고도 했다.]
몇 달 다닌 뒤 부모님을 따라 중국의 가족들을 방문할 허가를 학교에서 얻어 약 두 달 학교를 떠나 지냈다. 돌아온 후 진도가 처지지 않아서 예과 2학년에 진급했다. 얼마 후 학교가 앤더슨학교에 합쳐졌다. 그린타운 가까이 있는 공립 영어학교로, 집에서도 훨씬 가까웠다.

우리 골목 저쪽 끝에 사는 내버래트넘 부인이 나를 학교에 데려가도록 아버지가 부탁하셨다. 부인은 큰딸과 함께 앤더슨학교 선생님이었고 아침마다 인력거로 출근했다. 나는 아침에 그 집으로 건너가 두 분 발치의 작은 걸상에 앉아 학교로 갔다. 두 분은 늘 같은 인력거꾼을 불러서 네 사람의 모습이 아침마다 학교 가는 길의 단골 풍경이 되었다. 이듬해 본과 1학년 올라갈 때 부인이 담임선생님이 되었다. 매일아침 내게 영어로 말을 걸고 아버지에게 내가 빨리 배우는 학생이라고 말씀해주었다. 가장 즐겁게 배운 선생님으로 기억한다.
[역주 : 소학교에서 예과 2년은 부설유치원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과 2학년 때 담임 위도슨 양은 작달막한 금발 여인인데 정확한 영어에 대한 집착이 강한 분이었다. 학생들이 흔히 쓰는 말라야식 영어를 못 쓰게 하고 다른 언어 쓰는 것을 보면 엄하게 꾸짖었다. 광둥어를 쓰는 시내의 중국인 학생 몇이 반에 들어와 있었는데, 학교에서 광둥어를 쓰다가 걸려서 5센트씩 벌금 맞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위도슨 양은 이야기책을 많이 구해주어서 덕분에 내 영어도 늘었다. 그런데 이야기 속의 아이들은 영국 아이들이었고 생활과 행동이 우리와 아주 달랐다. 내 생활에 포개져 있던 사회적 단층에 또 하나의 층이 더해지게 되었다. 교실 속의 세계도, 이포를 구성하는 여러 공동체의 세계들도, 우리 가족과 주변 중국인 친지들의 생활과는 모두 큰 거리가 있었다. 책에서 읽는 영국인의 생활이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로 나타났다.
[Wang Gungwoo, 〈Home is Not Here〉(2018)에서 김기협 뽑아 옮김]